한줄 詩 3890

날씨는 먹구름을 발표하고 - 김대호

날씨는 먹구름을 발표하고 - 김대호 한사람에 대한 치유가 살아 있는 증거가 될 때 그날, 난 아무것도 안 하고 걷기만 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 보았다 병원에서 나와 편의점까지 가는 동안 거리에서 무수한 행인들의 눈빛이 이국의 문장이 되어 내 외투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손바닥 실금이 젖었다 살아질 거예요 걱정 마세요 의사의 말이 평범하게 남아 있다 이 이국의 거리 의사의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고 내가 의사에게 질문한 것도 모국어가 아니었으니 두려움의 파장만 있다 먹구름을 발표하는 날씨이다 편의점을 나오면서 병원 복도에 대기 중인 환자들의 눈빛을 닮은 상품들이 진열대에 다소곳이 진열돼 있는 것을 보았다 그날 나는 이국에서 온 통증을 모국어가 아닌 중얼거림으로 몸에 담았다 *시집/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

한줄 詩 2020.08.11

침침하다 - 정덕재

침침하다 - 정덕재 침침하다 가끔은 겹쳐 보이고 흐릿흐릿 숫자가 6인지 5인지 선명하지 않아 돋보기를 찾는다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는 게시판 벽보에서 디딤돌 같은 미음 받침이 힘겨워 보이거나 탈락한 받침들이 아우성거리면 문자를 깨우친 반세기의 세월이 소란스럽다 어느새 까마득한 저편이 되었는데 허겁지겁 인공눈물을 찾거나 걸쳐 쓴 돋보기를 올린다 안과에서 인공눈물 한 박스 들고 나오면 무심코 식탁 다리에 발목을 부딪친 눈물은 견딜 수 있는 위안이지만 건조한 것은 눈이 아니라 메말라 갈라진 갈증의 응시다 *시집/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걷는사람 1235를 아시나요 - 정덕재 내 비밀을 알려줘 복잡한 내 비밀을 알려줘 어제 바꾼 비밀변호가 생각나지 않아 내가 나를 몰라 1234567로 하면 쉽게 알까 ..

한줄 詩 2020.08.10

멈춰선 돌멩이 - 이학성

멈춰선 돌멩이 - 이학성 언제부터 그가 침묵하고 있었을까. 왜 여기 그는 멈춰서 있는 걸까. 나도 한때는 세상 어디로든 갈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지. 멀리, 더 멀리 가보려고 했으나 애타게 기다리는 이가 있어 과거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곤 했지. 그도 막다른 어디선가 돌아온 건가. 언제든 다시 달아나려고 궁리하는 중인가. 아니, 아니 이제야 기다리는 이의 심중을 읽었거나 힘없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 건가. 어쩌면 그는 나보다도 멀리서 왔을 거야 기어이 돌아가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야 해 기다리는 걸까. *시집/ 늙은 낙타의 일과/ 시와반시 도제 - 이학성 스승이라곤 내게 없었다. 학교 문턱을 요행히도 넘어서거나 교범이라도 한 줄 훔쳐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헐렁한 그릇을 누가 품어주겠는가. ..

한줄 詩 2020.08.10

고운 밥 - 전윤호

고운 밥 - 전윤호 신도 동네마다 이름이 달라 다르게 부르면 해코지하는데 밥은 사투리가 없다 이 땅 어디나 밥이다 함께하면 식구가 되고 혼자 먹어도 힘이 되는 밥 어떤 그릇을 놓고 어떤 수저를 펼쳐놓든 김이 오르는 밥 앞에서 모두 평등하니 이보다 귀한 이름이 더 있겠나 논이 부족한 제주도에서 쌀밥은 아름다워 곤밥이라 부른다니 사랑하는 사람이여 우리 밥이나 함께하자 *시집/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북인 환한 이별 - 전윤호 벚꽃이 이리도 환하게 지다니 오늘은 이별이 있어도 되겠네 차마 손 흔드는 가지에서 젖은 길바닥까지 하얀 이 드러내고 웃는 꽃잎들 세상이 이리도 예쁘니 슬프다 울 수도 없겠네 이제 낡은 다리 건너 떠나니 그대는 맘 편히 열매 맺으시라 잎 지는 가을 돌아와 꼭 껴안고 얼어붙어 겨울을 ..

한줄 詩 2020.08.09

인수봉 귀바위 - 박인식

인수봉 귀바위 - 박인식 새도 바람도 기척 없을 때 인수봉은 듣는 귀가 있어 운다 그 바위 울음을 노란 별밤으로 그려놓은 화가는 인수봉 꿈속의 고흐였을까 고흐 꿈속의 인수봉이었을까 바람의 대답을 듣자며 고흐는 자른 귀를 동네 창녀에게 주었는데 인수봉은 한쪽 귀를 누구에게 주었나 (목청 좋은 사람에게?) 인수봉 귀바위가 바람의 대답을 듣고 있는 걸 고흐는 알까 한쪽 귀로 남아 인수봉, 귀바위하다 고흐, 귀하다 무상(無償)의 행위예술하다 *시집/ 인수봉 바위하다/ 다빈치 인수봉, 고흐의 자화상 - 박인식 한쪽 귀를 잃은 외귀의 인수봉이 한쪽 귀 스스로 자른 고흐의 자화상으로 다가온 날 내 귓가에 맴돌던 미친 예술의 노래는 인수봉의 사라진 한쪽 바위 귀가 듣던 바람의 노래인가 고흐의 귀를 받아 든 아를르 여인..

한줄 詩 2020.08.08

후회는 너의 몫 - 성봉수

후회는 너의 몫 - 성봉수 나를 걸어 잠그고 나서지 않는 동안 기다려 주지 않은 시간과 돌아오지 않는 사람 내 안에 앉아 알 수 없었거나 그때는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 지금의 내게 후회로 남은 것처럼 지금은 아직 네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한, *시집/ 검은 해/ 책과나무 콧구멍에 흰 털 - 성봉수 늙은 잡종 개처럼 콧구멍에 털이 세상 밖으로 삐져나온 날 아버지가 면도하시던 거울 앞에 족집게를 들고 섰다 어라, 이것 봐라 흰 털이다. 콧구멍에 흰 털이라니 아무도 알려 주지 않은 기가 차는 노릇이다 아버지, 얼마나 많은 절망에 마주 서고 얼마나 많은 시름을 삭여 가며 세어 버린 세월을 안으로 감춰 두고 티도 없이 그토록 당당하셨느니 # 성봉수 시인은 1964년 충남 조치원 출생으로 1990년 신인작품 당선으..

한줄 詩 2020.08.08

잊거나 잊히거나 - 이정훈

잊거나 잊히거나 - 이정훈 코요테 한마리 독약 먹고 죽은 쥐를 삼켰죠 숨 끊어지기 전에 도끼로 꼬리를 내려치세요 뼈와 살이 잘리는 것 내장이 타들어가는 것 더 견디기 힘든 건 무엇입니까? 제게도 꼬리의 흔적이 있어요 피거품이 입을 막아 한마디 말 내뱉지 못했죠 손톱 발톱 다 빠지도록 바닥을 긁던 저녁 번갯불 관통하는 아픔으로 덮어야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누군가는 내 꼬리를 잘라주어야 했고 나도 어떤 이의 꼬리를 모래언덕 깊숙이 묻었답니다 막 도착한 당신, 모래성 속으로 초대합니다 노을과 바람으로 몸을 씻어요 모래 미소와 모래 눈물로 배를 채우고 모래의 테라스로 걸어오세요 떠나간 모든 게 남아 있는 그림자를 안고 춤을 춥니다 잊지 마세요, 다 잊어버리세요 원반 같은 달 아래 엉덩이에 빗자루를 매단 코요테들..

한줄 詩 2020.08.03

네가 길이다 - 조성순

네가 길이다 - 조성순 순례자여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마라. 오직 자신을 의지하고 스스로 길이 되어야 한다. 가고 있는 길이 의심나고 두려울 땐 걸음을 잠시 멈추고 조용히 내면에 귀 기울여 보라. 그러면 조개껍데기 골이 모이거나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 그곳이 바로 야보고가 오신 길을 네 눈으로 말씀한 것이다. 당황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라. 느릿느릿 천천히 길이 열린다. 네가 바로 길이다. *시집/ 그리고 나는 걸었다/ 행복한책읽기 길 - 조성순 혼자 걸을 때 길은 말합니다. 묻지 않아도 가야 할 곳을 보여줍니다. 바람이 오고 물소리가 옵니다. 고요 속에 딱따구리가 딱딱 풀벌레가 푸륵푸륵 가슴으로 진격해 옵니다. 홀로 걸어야 길이 옵니다. 여럿이 왁자지껄 갈 때 길은 침묵합니다. 온전히 만나지 못합니다...

한줄 詩 2020.08.02

발칙한 생각 - 조성국

발칙한 생각 - 조성국 사업한답시고, 영업한답시고 진탕 통음한 단란주점 모자란 술값 대신 속옷까지 홀라당 저당 잡히고 쫓겨난 주제에 고주망태의 알몸이 낯부끄럽고 쪽팔리는지는 아는지, 그 정신에도 업소 청소용 검정 비닐봉지에다 눈구멍만 두 개 뚫어 가면 쓰듯 머리에 뒤집어쓰고 버젓이 아랫도리 벌거벗은 채 집에까지 냅다 뛰는 꿈 깨고 나서부터 하여튼 얼굴에 시커먼 철면피만 깔면 된다는 이념으로 넉살 좋게 밥 빌러 가는 접대의 발걸음 한결 가뿐해지는 것이었다 *시집/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문학수첩 한 식구 - 조성국 절집 근방까지 전도 나온 목사를 쳐다보는 스님의 눈빛이 그리 곱지 않았다 또 한바탕 치고받기라도 할 듯 목사도 도끼눈을 떴다 마을 사람을 제각기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힘겨루기 하는 이번 참에는 목..

한줄 詩 2020.08.01

먼 곳 - 정진혁

먼 곳 - 정진혁 잘 늙은 마루에 누우면 먼 파도가 몸 어딘가에 모르는 저녁을 두고 갔다 저 너머 장재도에 노란 원추리가 흔들려 갑자기 오후 6시가 사라졌다 유자가 파랗게 매달려 익어 가는 수요일이다 등 굽은 할매가 저녁을 차리는 민박집 뒤뜰 고요만큼 빨랫줄이 흔들리고 냄비는 달그락달그락 끓어넘친다 말라 가는 생선의 눈을 본다 문득 전생이 멀다 바람이 분다 배롱나무 붉은 너울이 친다 마당을 지나는 슬리퍼 소리가 어둠을 끌고 간다 모기향을 피우면서 달력을 본다 입추가 얼마 남지 않았다 눅눅한 노트에 뭔가를 적어 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벽에 등을 기대는 사이 여름의 끝이 보였다 알전구를 껐다 물방울 같은 귀뚜라미가 밤새 저 너머를 울어 준다 내용도 없이 눈물이 난다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출..

한줄 詩 2020.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