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양지사우나 - 김정수

양지사우나 - 김정수 사막을 통째 뒤집어 사막으로 들어갔다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건 시간이나 둥근 나무의 건망이 아닌 모래의 지루한 순응 함부로 벗어날 수 없는 방에서 투명한 방으로 끊임없이 이사를 다녀야만 하는 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세월을 쌓고 또 쌓는 일 툭하면 그만 끝내자 화르락 문 열고 나간 당신이 하루 이후 돌아와 벽을 향해 비스듬히 눕던 일 밤새 뒤척이다 일어난 아침은 좁은 길로 탈출하고 더 깊어지기 전에 뱃속에 소문 들어서기 전에 서로의 출입문 달리하곤 끝내 발목의 속도 늦추는 일 반복된 바람은 다시 되돌릴 수 없고 오랜 습관에 모질게 모래언덕 넘어가는 일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 동거는 고비 같고 출입문에 찍힌 지문처럼 우연한 조우 당신은 한낮의 햇빛 구름처럼 벗어난 것인지 수건으로 낯선 ..

한줄 詩 2020.09.18

여주 - 최성수

여주 - 최성수 한때 여주에서 늙어가고 싶었다 어린 당나귀 한 마리 벗 삼아 두텁나루에 빈 낚싯대 던져두고 섬강 물살처럼 천천히 흐르고 싶었다 하루 종일 아무도 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에서 이제 나는 고집 센 늙은 당나귀 같은 아내와 낚싯대 대신 앞산 그늘이나 바라보며 멍하니 늙어간다 아내는 고집스레 내 병에 좋다는 여주로 만든 음식을 해낸다 여주에 사는 대신 여주를 먹으며 나는 때때로 오래전 가르쳤던 여주란 아이를 떠올리기도 하고 여주 고을처럼 곱게 늙어가는 법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생은 여주의 맛처럼 지독히 쓰고 조금만 상큼할 뿐이다 그저 그 쓴맛을 달게 받아들이며 남은 세월을 견뎌내는 것, 그 끝에는 텅 비어 고운 노을이 남아 있으리라고 나는 믿고 싶은 것이다 올해도 내년에도 여주는 울퉁불퉁 자라다 ..

한줄 詩 2020.09.17

사랑, 느닷없는 - 권혁소

사랑, 느닷없는 - 권혁소 검버섯은 피고 근육은 점차 소멸할 때 물매화를 닮은 아린 사랑 하나 내게로 와서 꽃 피우라 속삭인다 혼자 잠드는 일에 익숙해지던, 맹물에 끼니를 마는 날들이 늘어나던 오월의 어떤 신록 무렵이었다 뒤늦은 사랑은 그렇게 느닷없다는 말과 함께 와서 격조했던 언어들에게 말을 걸고 화석이 되어가던 심장에 맑은 물줄기 하나 흘려놓았다 사랑 그것은 광장을 밝혔던 촛불 같아서 내가 어두울 때 비로소 나를 환하게 한다 어떤 꽃은 지고 어떤 꽃은 피던 때였다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바다처럼 잔잔히 밀려오는 사람 - 권혁소 나중에 당신을 기억할 때 바다처럼 잔잔히 밀려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오물오물 뱉어내던 그녀의 말을 잔잔히 밀려오는 바다 같은 사람이라면 좋겠어요,라고 읽는다 사..

한줄 詩 2020.09.17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 - 김옥종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 - 김옥종 어제도 너를 보내준 꽃무릇 길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에 한 번씩은 헤어짐을 준비해온 터라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은 없을 거라고 촉촉이 젖어있는 어둠에 볼을 비벼댄다 서로에게 가까이 가는 길은 너무 힘들어 배롱나무 꽃이 져버린 달력을 넘기며 어둑한 밤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서 네 지친 그림자를 떠올리면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두려움인지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 사방은 어둡고 다다를 수 없는 너는 파도로 살아나 가슴으로만 그 여린 가슴으로만 무너져 내리는데 눈물 한 방울 없이 거칠게 잊어 줄 것 같은 계절에 앞서 떠난 바람이 대숲을 흔들던 날에도 서로 다른 부위의 상처가 누구의 심장에도 박히지 못한 침엽수로 떠돌고 있었으니 우리가..

한줄 詩 2020.09.16

정선 몰운대 - 전영관

정선 몰운대 - 전영관 나무와 사람은 슬픔의 속도가 다를 것 투신할 것도 아니면서 새들의 높이에서 아래를 보면 사랑의 문장이 바람에 흩어지는 것 같아 아프다 나무의 슬픔은 천 갈래로 몸이 갈라지고 뒤틀리면서 백 년 동안 천천히 머무는데 어제의 상실과 몰락 따위를 한탄하였다 벼랑을 움켜쥐고 선 소나무는 몸피를 키우는 일보다 쓰러지지 않으려 뿌리만 더 굵어졌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것들이나 차지하려고 악력을 키웠다 건성으로 타인의 역경을 칭찬하듯 드러난 뿌리들을 감탄하였다 애련(愛戀)을 앓는 이에게 여기를 권하겠다 하늘을 우러르면 슬픔도 흩어질 것 백년 소나무 곁에 앉은 채로 풍장을 치러달라고 바람에게 부탁했다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귀신 - 전영관 서로를 찌르는 가시덤불에 꽃을 놓다니 불행을 ..

한줄 詩 2020.09.16

어느 바위꾼의 죽음에 관한 짧은 보고서 - 박인식

어느 바위꾼의 죽음에 관한 짧은 보고서 - 박인식 추락사에 실패하고 (자유의 실패) 복상사를 꿈꿨으나 놓쳤다 (사랑의 실패) 마침내 다가오는 최후의 승리 고독사 (정확한 사인은 고독중독사) 3전 1승 2패 바위에서의 내 인생 전적은 *시집/ 인수봉 바위하다/ 다빈치 아직도 시퍼른 - 박인식 바위의 끝, 아무것도 없는 정상의 허망에 울던 그 노래 막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가슴 베는 칼날 푸르고 푸른 허무의 후렴 젊은 날의 바위는 현해탄에 몸 던진 윤심덕의 死의 찬미 떨어져 하나의 돌이 되자던 산에서의 죽음 찬미 아직도 놓지 못한 꿈 아직도 다 못 부른 바위의 노래 아직도 현해탄 밤바다보다 서퍼른

한줄 詩 2020.09.16

먼 곳이 있는 사람 - 손택수

먼 곳이 있는 사람 - 손택수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묵언도 단식도 없이 마침내 수행에 드는 사람 걷는 사람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 길을 찾는 핑계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가던 경포호가 언제든 갈 수 있는 집 근처 호수공원이 되어버렸을 때를 무던히 가슴 아파 하는 사람 올림픽 덕분에 케이티엑스 덕분에 더 멀어지고 만 동해를 그리워하는 사람 강릉에서 올라온 벗과 통음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도 옛일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쁜 자꾸만 연락 두절이 되어가는 영 너머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

한줄 詩 2020.09.12

비가 오면 추억에 잠기는 건가요 - 김대호

비가 오면 추억에 잠기는 건가요 - 김대호 손톱 발톱이 돋아나 있는 자리가 내 몸에서 가장 먼 곳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보다 먼 것이 있는 듯했다 내 몸의 일부인데 내 것인데 내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것 수술을 하고 투시사진을 찍어도 현상되지 않는 것 그러나 내 몸의 일부로 있는 것이 분명한 것 수시로 내 몸의 수축과 이완에 관여하는 것 기분에 관여하는 것 아무리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는 것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이 귀에 들어오고 고립되고 낮아지고 내 신체의 일환이지만 나와 따로 노는 것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누군가의 눈빛에 퍼뜨리는 것 그게 무엇일까 어디서부터 그것과 내가 꼬인 것일까 평생을 좌우하게 했던 어떤 선택 그 순간부터 그것과 나는 꼬이게 된 것일까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고 가야 할 일이..

한줄 詩 2020.09.12

이별 뒤에 남아서 - 한관식

이별 뒤에 남아서 - 한관식 찰과상 정도 가볍다고 생각한 나는 여전히 운동화 끈을 졸라매며 새벽을 내딛습니다 바람이 순합니다 발끝에 덜 여문 아침이 묻어옵니다 좀 더 속도를 낸다면 아침까지 내달릴 것도 같은데 새벽 산책로는 生을 사고파는 기대치의 가계처럼 늘 두근거리게 합니다 내 이전의 아우성 그것은 내 이전의 외침과도 같은 것. 어느 순간 욕망과 상관없는 일탈이 나를 첨예(尖銳)한 모습으로 만들어 종탑의 뾰족 지붕으로 살았습니다 이십대의 얘기였지요 고쳐 앉으면 가능성 없는 피안(彼岸)이기도 했습니다 운동화 끈이 이만큼, 풀릴 때도 되었는데 오지게 매듭처리가 된 듯합니다 지치면 등 뒤의 그리움이 말려 올라 무게가 되고 떠난 당신으로 하여 보푸라기도 한 움큼 묻어 날 것 같아 내 이웃도 놓친 한 발 한 발..

한줄 詩 2020.09.11

내가 짧아졌다 - 이강산

내가 짧아졌다 - 이강산 손에 쥔 것을 풀고 다시 쥔다 쥐는 것의 무게에 끌려 걸음이 빨라진다 이대로 길 끝에 닿을 수 있을지 들여다보면 어제의 내가 아니라 다행이지만 나는 어느새 나를 다 써버린 듯 그림자조차 짧아졌다 더 가볍거나 더 느리거나 내일도 모레도 반복될 나와 나, 길이 끝날 때까지는 나를 좀 아껴 쓸 일이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풍탁(風鐸) - 이강산 지금까지 채운 것 다 비우고 호수는 물뿐이다 바람의 손끝만 닿아도 심연까지 번지는 저 투명한 공명이라니 강원여인숙 102호실 문밖, 어느 방에선가 여인의 소리도 호수처럼 맑다 만 원짜리 지폐 두 장만으로도 떨리는 저 여인의 풍경이라니 세상의 호수와 여인숙을 건너 가까스로 이순의 추녀에 매달린 나는 아직 숨소리조차 둔탁한 쇠뭉치..

한줄 詩 2020.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