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몸의 작은 틈으로 - 김윤배

마루안 2020. 8. 23. 19:48

 

 

몸의 작은 틈으로 - 김윤배


언젠가, 건너기 위해

토함산의 일출쯤이면, 개마고원의 낙조쯤이면 어떨까
텐산의 봄빛쯤이면, 타클라마칸의 겨울쯤이면 어떨까

건넌 후, 서러워지면

몸의 작은 틈으로 펼쳐지는 미답의 생애는 적막한가

홀로 채색에 이르는 야생화, 그 꽃말들을 접으며 상실을 떠올렸다 상실 뒤에 많은 달빛의 빗장이 있다는 걸 터키식 커피 점괘로 알았다 어둠 깊어 커다란 별들이 호수를 이룬다 호수의 물결이 설렘이란 걸 깨닫고 나면 뒤에 남겨진 것은 밤하늘에 안긴 벗은 달몸이었다

무거운 속눈썹에 밤이슬 내리고

지상에서의 숨결은 다시 아프다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휴먼앤북스



 



파문 후의 꽃고비꽃 - 김윤배


군락을 이룬 꽃들 북쪽으로 쓰러지다/파문의 시작인 것

파문을 맞다/돌이킬 수 없는, 길 아닌 길인 것

길 끝에 서 있는 사람을 눈멀게 하다/보이지 않는 세상을 의심케 하는 것

어디까지 경계냐고 묻다/무수한 경계를 지우고 싶은 것
어디까지 대지냐고 묻다/마지막 질문을 의심하지 않는 것

어긋난 것들은 독을 품다/중추로 번지는 가사여서 황홀한 것
독으로 파문을 견디다/앤딩 화면의 음악은 우울한 것

파문 후, 꽃고비꽃은

보라색 꽃이 보라색 꽃물로 진다, 어느 육신이든 뿌리 내리고

살아야 목숨이다


 

 

# 김윤배 시인은 1944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한국방송통신대, 고려대 교육대학원 및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겨울 숲에서>, <떠돌이의 노래>, <강 깊은 당신 편지>, <굴욕은 아름답다>, <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 있다>, <슬프도록 비천하고 슬프도록 당당한>, <부론에서 길을 잃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바람의 등을 보았다>,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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