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연장론 - 이서화​

마루안 2020. 8. 27. 19:08

 

 

연장론 - 이서화​


손을 놀려야 먹고산다고
말한 사람은 몇 년째 손을 놀리고 있다
펜치며 연장들의
앙다문 입으로 녹이 눌어붙어 있다
잔뜩 오므린 채 떼어도 펴지지 않는
식음 전폐다​

몇 년 무소식 끝에
집수리 부탁하려 찾아간 김 씨의 사정은
사람도 기술도 그 수족도 폐업이다
수많은 연장들의 수장이었던 사람은
밥보다 알약을 더 많이 먹는다
그나마 열리는 입에선
흔들리고 떠는 말들뿐이다​

돌아오는 길,
봄은 또
연장들도 없이 나무마다 달라붙어
꽃 피는 공사 중이다
고장 난 우리 집 수도 파이프는
어느 봄의 독촉으로 졸졸 새고 있는가
꽉 다문 연장들의 입을
어떤 봄의 입김으로 녹여야 하나


*시집/ 낮달이 허락도 없이/ 천년의시작

 

 

 

 

 

 

집밥 - 이서화


둥그런 양은 밥상에서 후일을 도모하던
칠 벗겨진 봉황이 생각난다
봉황은 가끔 그 집 사내의 손에서
와장창 날기도 했지만
기껏 문지방을 넘어
마루를 채 벗어나지 못하는 짧은 비행이었다
아내는 널브러진 봉황의
그 가늘고 찌그러진 네 개의 다리를 접어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곤 했다
도모하던 것들, 칠 벗겨진 것들이
유일한 재물이기도 했던 그 집
집밥은 불안한 맛이다
네 개의 다리가 흔들거리고 받치고 있던
식사를 위한 불안한 반찬들
봉황은 기어이 다리가 빠지고
부엌과 안방을 벗어나
지금은 장독 위에서
장독 뚜껑을 대신하고 있다
더는 날지 못하는 봉황
어쩌면 날고 싶은 마음만 분분했을 것이다
겨우 한 집안의 식솔들 배도 양껏 채우지 못한
봉황의 꿈이란
허황된 전설 같은 것이었으니
세상엔 지긋지긋한 전설도 있기 마련이다
집밥, 허기가 또 가까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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