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담쟁이의 하루 - 백성민

담쟁이의 하루 - 백성민 은밀함으로 기어올랐다. 행여 들킬까 바람의 기척에도, 달빛에게도 숨을 죽였다. 왜라고 묻지 마라. 감각의 촉수는 삶의 자리를 탓하지 않았고 그저 한 뼘만 더 오를 수 있다면 무엇인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바람이 몰아친다고 서리와 눈보라 속에서도 놓을 수 없는 것 때론 우직한 욕심이고 미련한 정직함이라고 손가락질할 때도 품어 안고 삭여야 할 모든 것이 감사함이었다. 사철 붉은 잎이 진다. 새벽은 먼데 오늘도 비틀거렸던 하루가 쓰러진다. *시집/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것처럼/ 문학의전당 황혼 - 백성민 해 저물녘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걷다 시들어가는 장미 한 송이를 본다. 가슴을 찔러오던 가시의 날카로움은 이미 시들었고 향기를 뽐내던 유혹도 사라진 지 오래 지워져 가는 시간..

한줄 詩 2020.09.02

쓸데없이 헤프거나 막된 - 박수서

쓸데없이 헤프거나 막된 - 박수서 * 사랑은 밀가루반죽처럼 치댄다고 수제비나 칼국수가 될 수 없다 뚝뚝 떼어 뜨끈한 국물에 올려도 심장을 끓게 하지는 못할 일, 국뚜껑이 벌컥거린다고 다 진국은 아니야, 간이 덜 배인 그저 덜 우러난 육수의 뚝배기 귀를 만지작거리는 * 사내와 사내가 마주보고 있다 사내가 국을 건네고 사내가 술잔을 내놓는다 사내는 뭉크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고, 사내는 바그다드카페를 가고 있다 사내는 뽕짝을 불렀고 사내는 만화영화 주제가를 틀었다 사내가 있었으나 사내가 없다 * 마라 맛을 넓고 깊게 느끼다 보면, 이것저것 라면 수프를 총집합한 풍미가 혀에 맺힌다 * 언제부터인가 혼자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일이 불편하지 않아졌다 집 나간 텃새 백 마리를 헤아리며 꼭꼭 씹어 먹으면, 새털처럼 ..

한줄 詩 2020.09.01

서성이는 묘지 - 안숭범

서성이는 묘지 - 안숭범 벌초를 끝내자 단정한 죽음이 뒤챈다 먼 길 돌아가야 하는 여름밤이어서 풀벌레가 나를 불러 세우는 간격으로 살 오른 불안이 그때의 부음을 다시 앓는다 만약이란 약을 종종 복용해 왔다 오늘은 내가 사라진 이후의 우주에 대해 생각한다, 안으론 가뭄이었으나 물푸레나무처럼 이라고 쓰인 묘비명을 중얼거린다 자기가 모르는 시간에 이빨을 가는 영혼이 있었노라고 허나 자격 없는 그리움 한 줌 받았으므로 괜찮다, 하고 얼버무리자 하산하는 길이 정연하다 연필심이 부러지고 나서야 끄적이는 일을 생각하듯이 낡은 터미널엔 매미가 몸 뒤채며 지핀 가냘픈 바람 외등 곁에선 용케 부딪치지 않고 서로를 흠모하는 벌레들 자물쇠 채워진 자전거만 홀로 시간의 귀를 쓰다듬고 있다 자물쇠도 걸어 놓지 않은 마음에 관해 ..

한줄 詩 2020.08.31

만경창파 - 박미경

만경창파 - 박미경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밀려난 사랑초 명주실처럼 말라가고 있다 커다란 검정비닐에 담겨 나오던 생활 도구들이 소란스럽게 떠들다 남편에 의해 버려졌다 일가의 옷들은 포대기 터지도록 담겨 축 쳐진 채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올라오는 얼굴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간간이 치매 걸린 시아버지만 결코 잊히지 않는 기억을 붙잡고 큰소리로 나를 찾을 뿐이다 종일 흘러가는 길에 둥둥 떠다녔다 캄캄한 시간 속에서 짜놓은 계획 같은 것을 따라가기도 했다 곡선에 숨어 자라난 희귀성 침엽, 세 차례의 반복 만 팔천 번 따라온 고통, 장기 끝에 고인 똥물조차 끌어 올렸다 등 뒤에 바짝 붙어 얕은 잠에 빠진 아이의 숨소리 적막에 적막이 겹친 눈에 일렁이는 파도 *시집/ 토란꽃이 쏟아졌다/ 詩와에세이 꽃, 피는 때 -..

한줄 詩 2020.08.31

눈에 띈 슬픔 - 정병근

눈에 띈 슬픔 - 정병근 베란다에 '흰꽃나도사프란'이 시들었다 마른 꽃을 단 채 머리를 풀었다 정수리 가마가 다 드러나도록 이러하니 그만 창을 닫아줘요 간곡한 외면, 모든 것은 나 때문이다 은유는 유구하고 옛날을 떠올리는 습관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진 적이 있구나 순간의 예지로 사진을 찍고 너를 기린다 세상은 아무 곳과 아무 때와 아무 것이었는데 나로 하여 네가 생겨나고 헤어졌다고 들었다 네가 나의 한평생이 되는 그런 필연의 내막 속에 나는 자꾸 미끄러지고 어긋난다 아주 어긋나서 너를 오래 잃고 뒤늦게 안 보여서 운다 옛날에 저질러진 사람아, 내 눈이 가는 곳에 있지 마라 예쁘고 슬픈 상징이 너를 덮기 전에 눈에 띄는 것은 좋고도 슬픈 일이다 공중에 터지는 불꽃처럼 담장 위에 피어버린 꽃처럼 *시집. 눈과..

한줄 詩 2020.08.31

미신을 믿고 여름을 조심하고 - 김대호

미신을 믿고 여름을 조심하고 - 김대호 각시붓꽃이 거느린 보라의 세계는 겨우 자신의 체중을 견디는 정도였다 아침에 비 맞은 붓꽃과 반짝이는 보라와 뒷산에서 내려온 짐승을 보았다 내 하루는 그것들의 생태에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다 지중해로 여행을 떠났던 피곤의 배경이 아침에 본 보라의 세계라면 나는 더욱 사소해져야 될 일 사물의 풍경에 후회를 섞은 건 내 착각이었지만 내가 매일 여러 개의 퍼즐로 쪼개졌다가 잠들기 전 각각 다른 무늬를 분류하고 모으고 성질이 비슷한 장르끼리 묶는 수고를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것만으로 낯선 감정이 도착하지는 않으리 미신을 믿고 여름을 조심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모은다 너무 멀어서 은밀하지 못한 것들 너무 가까워서 부풀어 보였던 것들 아플 때마다 어둔 방을 방문하던 불편..

한줄 詩 2020.08.30

손이 없다 - 이소연

손이 없다 - 이소연 빛이 한 짓인가 간판 하나 믿고 들어앉은 마음 쫓아내는 빛 지금 이 순간에도 검게 스러지는 빛이 있고 끝까지 가고 싶은 빛이 있다 다시 쫓아가는 빛 상점들은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 숨을 쉬려고 숨 좀 쉬자 무정히 벌목되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길, 발이 없는데 길이 있는가 걸을 수 있는가 그 어떤 발자국도 남길 수 없는 길 그러니까 양동이처럼 엎어진 마음이라 차례차례 건물 입구에 있네 산산조각 날 것이 더 이상 없는데 떨어진 그림자들이 외투를 찾을 시간 앞을 삼킨 건물주는 이제 뒤도 삼킬 거야 밤과 새벽 사이, 존엄이란 말은 더 이상 쓰이지 않고 나는 가끔 평생을 모은 일상부터 잊힌다 아시다시피 하루하루 달력 없는 골목에서 나는 하루의 마지막 일초였다 이제는 초침처럼 버려지는 빗소리를 ..

한줄 詩 2020.08.30

푸른 잉어의 나날 - 서영택

푸른 잉어의 나날 - 서영택 내 가슴엔 푸른 잉어가 산다 말을 할 때마다 잉어가 꿈틀거린다 지나가는 당신의 가방에서도 흘러내린다 차선을 넘고 도로마다 가득하다 그림자가 일그러진다 벽을 가른다 절망의 냄새도 기억되지 않는다 잉어가 아니라 잉여다 폭우는 모든 걸 허물지만 한번 세워진 관습은 완강하다 절망은 절망의 태도를 낳는다 보이지 않는 권력 지하로 편입된 나는 잉여를 먹고 산다 문들은 더 견고해지고 벽들은 높아진다 비가 와도 젖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밟아도 밟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시집/ 돌 속의 울음/ 서정시학 술빛의 저녁 - 서영택 취한 사내의 눈동자 속 소낙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저물어 가는 길모퉁이 첫사랑이 펄럭이고 비는 이리도 내리는 걸까 마당에 매여 있는 소의 잔등에 더운 김이 오릅니다 아버지..

한줄 詩 2020.08.30

개 같은 - 이돈형

개 같은 - 이돈형 즐거움을 떠난다 천천히 안에서 자라는 인기척의 새끼들은 이미 세상의 거짓말을 다 배우고도 모자라 한 번쯤 참말을 배우려 하는지도 몰라 빛 좋은 개살구처럼 빛을 따라다니며 어디서 살구살구 찾을지 몰라 떠난다 구질구질한 개과천선을, 실컷 뜯어먹은 안녕을, 아직 늙는 중이라는 변명을, 누런 이빨이 낀 차창을, 급정거한 애인의 엉덩이를, 꼬리 밟힌 즐거움을 인간적이라 말하던 인간적인 아가리를 운동화 끈을 매다 잊어버린 매듭의 주둥이로 떠난다 오래 걸린 눈동자의 노동이었다고 눈을 깔고 떠난다 열어보면 칙칙거리다 만 라이터처럼 버려진 눈이 가득한 캐리어를 끌고 떠난다 잡아먹힌 일화처럼 인간적인 사랑보다 차라리 개 같은 사랑이 낫겠다 싶어 개같이 떠난다 인간적으로 발정 나서 떠나는 것이다 *시집,..

한줄 詩 2020.08.29

테두리로 본다는 것 - 박남희

테두리로 본다는 것 - 박남희 그는 알이 없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본다 멋을 위한 것일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희뿌연 달무리가 떠오른다 달에게 달무리는 왜 필요할까를 생각해보면 안경 테두리의 효용을 이해할 수 있다 테두리로 본다는 것 눈과 세상 사이가 너무 황홀해 그 사이에 유리는 빼고 그냥 테두리로 세상을 보고 눈을 본다는 것 그냥 맨눈으로 보는 것이 너무 죄송해서 테두리로 보는 것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다 눈부신 세상을 바라볼 때 까만 테두리가 있어 세상이 또렷이 보이는 그런 당위성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테두리로 본다는 것 그것에는 왜 유리가 없느냐고 나무랄 수 없는 유한의 광활한 바깥이 있어 달보다 달무리가 아름다운 것이라고 토성이 천왕성을 보듯 그는 알이 없는 안경을 끼고 세상의 바..

한줄 詩 2020.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