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자미 꽃그늘 돌아서는 - 김윤배

자미 꽃그늘 돌아서는 - 김윤배 분홍 꽃숭어리에서 몸내가 올라왔다 향기이기도 하고 정한이기도 했다 자미를 두고 설렘은 후회거나 탄식이었지만 홀로 피고 이울기를 한 계절이다 자미는 마지막일지 모르는 꽃망울을 터뜨렸다 자미꽃 여름은 내내 혼돈의 서사들이다 우레 다녀가고 낙화의 새벽 뒤엉키는 일 잦았다 먼저 핀 꽃이 먼저 시들지 않는 모순, 낙화의 길에 들어서 뛰어내릴 순간을 찾는 일은 더 혼란스러웠다 보이지 않는 질서가 꽃 피우고 지우는 밀명, 이끌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다 끝내, 자미 꽃그늘 돌아서는 여름 한낮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휴먼앤북스 미선나무의 흰 꽃의 시간 - 김윤배 척박한 봄이었으니 꽃차례조차 무한총상이다 너는 그렇게 봄의 시간을 묶고 삶을 묶는다 속수무책, 부러지기 쉬운 줄기..

한줄 詩 2020.07.31

첫 배를 타야겠다 - 이강산

첫 배를 타야겠다 - 이강산 꼭 한 사람 찾아가야겠다 웅크리고 앉아 바다를 뒤집어쓴 섬이 컥컥, 숨넘어가는 소리로 뒤척여 바다를 잡아당기다 잠을 깼다 섬 홀로 두고 온 날은 꿈도 섬처럼 아득하다 닻을 내릴 틈도 없이 사라진다 팽나무 아래서 슬그머니 바다를 찔러보던 나처럼 지금쯤 섬도 선착장에 앉아 밀물을 집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다고 배가 달려오는 게 아니다 섬도 안다 외로워야 먼 길이 가까워진다 찾아갈 사람이 보인다 늦기 전, 첫배를 타야겠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손님 - 이강산 고향여인숙 9호실 불이 켜지자 간판 불이 꺼졌다 나는 또 마지막 손님인 모양이다 명성식관 소머리국밥집은 내 앞에서 문이 닫혔다 나는 속병이 심해져서 맨밥만 먹을 것인데, 이대로 잠들면 빈방처럼 속이 캄캄해질..

한줄 詩 2020.07.30

맨드라미 - 박춘희

맨드라미 - 박춘희 처음부터 빨갛게 끓어오르진 않았다. 빈집 우체통 곁에 함께 눈비 맞고 오래 기다려 주다가 날이 갈수록 날 선 독촉장에 속을 있는 대로 끓였다지. 그 여름 죽은 목소리를 뒤집어쓰고 끙끙 앓았단다. 수위를 넘긴 우체통 언제부터 수취 불능 상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할 때쯤 맨드라미 껴안고 악을 쓰다가 독기 빠진 글자들 씨앗으로 콕콕 박혔단다. 죽은 편지를 들고 조문조차 꿈꿀 수 없었던 그해 여름 수취 불능을 끄고 맨드라미 천천히 죽어 갔다. *시집/ 천 마리의 양들이 구름으로 몰려온다면/ 파란출판 감정의 바깥 2 - 박춘희 칠월 땡볕 끈질기에 꼬이는 파리 떼 누군가에게 사체는 구멍마다 알을 슬어 놓는 아늑한 자궁이 되기도 하는데 몸을 얻는 것은 언제나 삶의 문제인데 파리의 일생이나 개의 ..

한줄 詩 2020.07.30

뿌리, 하고 말하면 - 황형철

뿌리, 하고 말하면 - 황형철 태풍 언저리에 회화나무 송두리째 몰골 드러냈다 맥아리 없이 한 방에 훅 간 것이다 평소 조경에 식견이 있는 모 씨가 말하기를 겉만 번지르르하지 스스로 뿌리 못 내린 탓이란다 영양제 잔뜩 맞춰 덩치만 키우기에 급급해 태생이 편편약골인 것이다 하물며 풀 한 포기도 뿌리가 굳고 실해야 하는 법이어서 마땅히 땅의 습성 충분히 익히고 땅이 받아들인 밤낮의 시간을 체득해야 하는 것 가장 막막한 곳에서 가장 힘차야 어둠을 열고 더 깊숙이 내려갈 수가 있어 비로소 단단히 흙 붙들 수 있는 것 짱짱하게 줄기 키워 꽃도 피울 수 있는 것 땅에 스민 그림자와 땅이 딛고 있는 허공까지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와 함께 하세월에 풍파도 견디며 내공을 쌓은 후에야 나이테를 두텁게 얻을 수 있는 것..

한줄 詩 2020.07.30

장마 이후 - 김정수

장마 이후 - 김정수 늘 꽃이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신호등이 바뀌자 우산 세 개를 든 중년 사내가 뛰어갔다 우산 두 개를 든 여자와 늙은 사내가 애타게 애처롭게 뒤를 돌아보았다 건널목 중간에 다리가 불편한 늙은 여자와 중년 사내가 섬처럼 서있었다 맹렬하게 차량들 쏟아지는 길 위에서 중년 사내가 늙은 여자의 젖은 머리를 연신 매만지고 있었다 내부순환도로에서 떨어진 빗물이 파문에 찰방거렸다 붉은 눈에 걸려든 발이 틈, 사이에서 서성거렸다 꽃은 아무리 많아도 빈 곳을 다 들여다보진 못했다 내가 그토록 사거리 건널목에 붙박인 것도 처음이었다 엄마는 저리, 노인요양병원 침상에서 6년을 멈춰있었다 입관하고 난생처음 만져본 얼굴은 차갑고 차가웠다 하마터면, 오래오래 뭍으로 건너온 늙은 섬을 "엄마" 하고 부를 뻔했다 ..

한줄 詩 2020.07.29

탈상 - 강민영

탈상 - 강민영 마지막에 지우는 건 흔적 아니면 불판에서 오그라드는 돼지 껍질 짝이 없는 저고리에 불을 놓자 진저리치듯 뒤틀며 오그라든다 싸구려 천 냄새가 시큼하다 옷장 틈에서 굴러 나온 돌돌 말린 양말 껍데기 안에 또 하나의 껍데기 우리는 어쩌면 껍데기만 지우는지도 몰라 아직도 양말은 발의 체온을 기억할까 발톱에 걸린 실밥이 풀려나와 있다 돌돌 말린 퀴퀴한 냄새가 달아날까 조심스레 주머니에 담는다 평생 아버지의 얼룩을 지우며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도 모르던 어머니에게는 이제 걸레를 내려놓고 곧게 펼 몸이 없다 한 번씩 떨어지는 기름 덩어리에 불길이 훅, 하고 올라갈 때마다 눈동자가 붉어졌다가 내려가는 식탁 상속(相續)에 침을 삼키는 식욕들이 하나둘, 불판 앞으로 모여든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

한줄 詩 2020.07.29

여름 저녁을 기록하는 일 - 박서영

여름 저녁을 기록하는 일 - 박서영 담벼락 밑에 웅크리고 앉은 노숙자의 발끝에서 영혼이 빠져나오지 못한다 붉은 장미꽃 그늘 아래 발끝을 모으고 앉아 있는 고양이는 공기의 도축을 이미 알아차렸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은 토막 난 장미의 거친 숨결 첫 번째 죽음의 매혹을 기록하는 일이다 육체와 그림자를 분리하기 위하여 바람은 한동안 끙끙거렸다 냄새와 울음이 동시에 바람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그 담벼락을 스쳐 지나온 사람 기록들을 정리할 때 그곳에 두고 온 그림자에 대해 생각한다 내 그림자는 아직도 나에게 오고 있는 중이다 노숙자의 발끝에서 그림자가 태어나고 있다 발뒤꿈치엔 둥근 파문이 화석처럼 굳어진 지 오래고 그는 담벼락 밑에 앉아 햇볕을 쬐는 시체 나는 공기의 도축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그 풍경..

한줄 詩 2020.07.28

구름의 방향 - 박수서

구름의 방향 - 박수서 세월과 시절을 잡아둘 수 없지만, 제트기가 지나가고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똥줄처럼 공중에서 산산조각 나버리지만, 흔적은 가슴에 박무처럼 머물고 새총처럼 허공에 포물선을 긋는다 영원히 갈 수 없는 나라를 생각하는 날은 유효기간이 지난 여권을 펼쳐보듯 그리움의 얼룩이 졌고 내내 한 곳만 보고 있자니 눈 밖으로 사라져버렸고 끝내 저 하늘 어디로 갔는지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게 하늘의 조화 때문은 아닐 것이니 저 하늘 어디라도 구름은 있을 것인데 그저 허투로 바라보다 놓쳐버렸거나 고개 들어 한번 망연하게라도 올려보지 못함이라 풍향계처럼 수직의 축을 가슴에 꽂고 바람의 방향으로 톱니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하여도 정확히 방향을 읽지 못한다면, 먼저 나를 관측하고 옳게..

한줄 詩 2020.07.28

신발 베고 자는 사람 - 유홍준

신발 베고 자는 사람 - 유홍준 아직 짓고 있는 집이다 신축 공사 현장이다 점심 먹고 돌아 온 인부들 제각각 흩어져 낮잠 잘 준비를 한다 누구는 스티로폼을 깔고 누구는 합판을 깔고 누구는 맨바닥에 누워 짧고 달콤한 잠의 세계로 빠져 들어갈 준비를 한다 신발 포개 베고 자는 사람은 신발 냄새를 맡는다 웃옷 돌돌 말아 베고 자는 사람은 웃옷 냄새를 맡는다 딱딱한 각목 동가리를 베고 자는 사람은 딱딱한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찌그러지든 말든 상관없는 신발 두 짝을 포개 베고 자는 사람은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과 새로 사야 할 것들 이제는 다 옛일이 되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사실은 아무 생각도 안 한다) 아직 문짝이 끼워지지 않은 집은 시원하다 시원하다는 것은 막히지 않았다는 거다 세상 모든 집은 완공되기 전에..

한줄 詩 2020.07.28

각근하다 - 박미경

각근하다 - 박미경 땡볕 아래 치약으로 운동화 씻어 장독대에 붙여 세워놓은 눈부신 흰빛에 반해서 혼자 아들 다섯을 먹여 살리던 옆집 아주머니 그 셋째아들 덥석 큰 짐 끌어안고 말았다는데 흰 운동화 덫에 걸린 여자 구두만 신고 다니는 여자 남편이 외박할 때마다 구두 사쟀다 신발장 채워지면 이혼한다며 그 신 잘 넘기기 위해 꼭대기 스물한 평 아파트 무너져라, 악쓰다가 밥상 차린다 남편이 좋아하는 흰쌀밥 조기 노릇하게 굽고 김 소고기찌개 공손하게 밥상 받은 남편 주저리주저리 그녀 노여움 살피며 털어놓는다는 말이 허파 뒤집는 일 너거엄마는내한테제삿밥먹으러오는거보면체면도없제 홧김에 조기 접시 뺏는 여자 *시집/ 토란꽃이 쏟아졌다/ 詩와에세이 욕쟁이의 호적 - 박미경 노쇠한 흙담이 집을 꼭 끌어안고 있었지 집은 울..

한줄 詩 2020.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