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 허연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 허연 사랑이 끓어넘치던 어느 시절을 이제는 복원하지 못하지. 그 어떤 불편과 불안도 견디게 하던 육체의 날들을 되살리지 못하지. 적도 잊어버리게 하고, 보물도 버리게 하고, 행운도 걷어차던 나날을 복원하지 못하지. ​ 그래도 약속한 일은 해야 해서 재회라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 때맞춰 들어온 햇살에 절반쯤 어두워진 너. 수다스러워진 너. 여전히 내 마음에 포개지던 너. ​ 누가 더 많이 그리워했었지. 오늘의 경건함도 지하철 끊어질 무렵이면 다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서로 들고 왔던 기억. 그것들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것이 저주였음을. ​ 재회는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아니었음을. 오래전 노래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 그리움 같은 건 들키지 않기를. 처음으로..

한줄 詩 2020.09.09

목욕탕 옆 김밥집 - 김요아킴

목욕탕 옆 김밥집 - 김요아킴 -금곡동 아파트 독서실 의자에 붙잡혀 있다가 수제비로 허기를 달래는 딸아이에 아비는 김밥 한 줄을 더 보태었다 서로의 어깨가 연골처럼 부딪히는 자리, 무작정 밀치고 들어와 고집 묻어나는 쇳소리로 주문을 거는 노인들 불조심 마크 선연한 모자 속 땀내가 국물처럼 피어오르자, 배배 꼬인 면발이 태극기마냥 젓가락에 나부꼈다 서로 다름을 모두 붉은 낙인으로 찍어대던, 분노는 배고픈 북쪽의 일용할 양식이 될 쌀 한 톨에까지로 이어졌다 김 속의 밥알을 곱씹다가, 딸아이는 그 빨간 깍뚜기를 집다 말았고, 아비는 서둘러 잔돈을 지갑에 구겨 넣었다 거리에 찍힌 무수한 발자국, 그 무게와 모양이 각기 다르다는 걸 딸아이는 처음으로 교과서 밖에서 배우고 있었다 *시집/ 공중부양사/ 애지 수정탕에..

한줄 詩 2020.09.09

파란 달 - 이운진

파란 달 - 이운진 기억을 허문다 내가 온갖 죄를 지은 저 아름다운 시절과 돌림병 같던 청춘을 헐어서 기억으로도 돌아갈 곳이 없어졌으면 하고 어느 날 내가 당신을 처음 알던 백일홍 나무 아래 서 있을 때 갓 핀 꽃송이가 먼저 알고 반겨도 나는 처음인 듯 슬펐으면 가장 어두운 눈 속에서 가장 밝은 당신이 사라질 때 한 날에서 다른 날로 옮겨 가듯 무심히 아팠으면 얼굴이 없는 나를 만났을 때도 밤보다 깊은 문장을 잃었을 때도 눈만 가만히 감았다 뜬 채, 지나간 시간을 허무는 그런 밤에는 눈물이 울다 간 자리에 파란 달이 뜬다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천년의시작 옛 일기장을 찢으며 - 이운진 서랍 속에서 낡아버린 일기장을 읽다가 찢어버린다 젊음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초라한 청..

한줄 詩 2020.09.08

망각 - 조성국

망각 - 조성국 자기공명단층촬영 필름에 새겨지듯 왼쪽 측두엽과 후두엽의 일부가 깨져 하야한 녹처럼 부종이 슬었다 말투 어눌하고 기억도 아렴풋해서 생각이 안 났지만 기억이란 그렇다 깨진 기왓장 가루 빻아 포름히 녹슨 놋그릇 짚수세미로 문질러 닦으면 번쩍번쩍 광이 슬어 얼굴 얼비치듯이 아무것도 잊히지 않는 기억의 처방약 장기간 복용해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는 것, 신경외과 의사 치유 용법대로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라면 한 가지 단 한 가지만, 일테면 설령 누군가 그 한 가지에 대해 말을 꺼내더라도 처음 듣는 이야기마냥 귀가 쫑긋해지는 것 이것에 대해서만 기억나지 않았으면 했다 밝고 빛나는 기억의 저편에 탁하고 추하고 속악한 것 내가 척지고 등 돌리고 원수졌던 것 되살아나지 않았으면 하였다 *시집/ 나만 멀쩡..

한줄 詩 2020.09.08

몸의 명상 - 백무산

몸의 명상 - 백무산 이렇게 한심한 날에도 배는 고파 뭘 먹을까 이리저리 머리 굴리고 이렇게 슬픈 날에도 죽은 자 앞에서 갈비탕에 수육 접시 맛있게 비우고 이렇게 개 같은 날에도 좀 전에 배불리 먹은 밥은 간데없고 뭘 먹지 식당 골목을 기웃거리고 종일 한 일이라곤 지워버려야 할 일과 밥 먹은 일밖에 없는 날에도 절박함에 답을 찾아야 할 머리에는 식욕이라는 김이 뿌옇게 서려오고 먹는 일 때문에 통증도 무디어지고 머리에 끓어오르던 피는 위장으로 콸콸 흘러가고 아무리 유치해져도 다 그런 거지 뭐가 되고 그 유치함이 고뇌를 웃기게 만들고 허기가 저 높은 곳을 슬슬 비웃고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식욕인 것인지 식욕의 신전에 하루 서너번 머리 조아리고 슬픔의 끝에서 몸이 분해되다가도 고뇌의 회로에 갇혀 과열되다가도..

한줄 詩 2020.09.07

저녁, 외딴집 - 김성장

저녁, 외딴집 - 김성장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여든 노인의 때 전 머릿수건 들판의 헤게모니가 바뀌는 시간 노인이 뒷모습을 보이자 벼가 익는다 강 쪽으로 줄지어 선 집들, 빈 것들 방의 허공은 그나마 남겨두고 떠난 사람들, 빈것들 마을의 북쪽 떠나면서 상념이 더 길어졌다 골짜기의 음산이 노을에 끌려온다 바람은 문을 닫으며 초저녁 뒤로 사라진다 새들이 들판의 고요를 접는다 떠나면서 거미줄 잠금장치 하길 다행이지 노인이 방문을 열자 덜컥 낡은 구루마 바퀴 빠진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처마 아무 참견하지 않는다 이제 간섭은 이 근처에서 사라진 현상 헛간에 걸린 낫이 회고록의 새로운 필진이 되었다 표지엔 붉은 녹이 가득하다 들킬 것도 없는 내면의 풍파 늙는다는 건 말라간다는 것 익는다는 건 푸석해진다는 것 오래된..

한줄 詩 2020.09.07

부에노스아이레스, 동경, 서울역 - 강민영

부에노스아이레스, 동경, 서울역 - 강민영 막차 뒤에 다른 세계가 열린다 뭉글뭉글 밀려오는 포복한 기운들 냄새가 바짝 따라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동경 서울역 바닥을 칠 때에야 찾게 되는 바닥 마지막 하나를 남긴 노숙은 의외로 가볍다 혼자 들어앉은 굴속, 강 건너 네온사인은 강 건너의 일 호루라기 신호가 규칙이다 침 뱉은 빵을 던져줘도 분노하지 않는 흐린 눈으로 느릿하게 돌아누우면 성공이다 뭉개고 짓밟아도 매일 발기하는 노숙 부에노스아이레스 동경 서울역 그 도심의 끝에는 이른 아침 갠지스강처럼 어제가 부산물로 떠다닌다 침묵하는 도시 수십 개의 세계 수천 개의 섬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삶창 돌사막 - 강민영 내가 지나온 사막에는 한 떼의 낙타 뼈조차 보이지 않는다 별똥별에 발끝..

한줄 詩 2020.09.03

거울이 있는 병실 풍경 - 조현정

거울이 있는 병실 풍경 - 조현정 소리 없는 비명의 날들은 언제나 삶을 잘 여미기도 전에 찾아온다 아무 상관없는 것이 있을까 나와 얼굴이 같은 민머리 여자 동굴처럼 성가시게 입을 벌리고 그르릉그르릉 울고 있다 목에 박힌 관을 따라 들어간 호스 서리꽃 핀 나뭇가지 사이를 돌아다니며 몸속을 긁고 있다 사랑에 발등 찍혀 절절매었느냐 막차가 끊어진 정거장 서성대다 매운바람에 눈물 떨구던 날 있었느냐 날이 밝으면 어린 자식들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노란 승합차를 기다려야 하는 한낱 하품 같은 것들이 서러운 눈알을 굴리며 지나간다 저 멀리 눈발을 헤치고 사람의 눈동자를 가진 독수리 한 마리 거울 속 깊이 고랑을 내어 피 묻은 깃털의 뿌리를 심었다 머지않아 펄럭이는 날개 틔우리라 그녀의 넘어갈 듯 걸쳐진 눈동자에 아스..

한줄 詩 2020.09.03

있잖아요, 분홍 - 정진혁

있잖아요, 분홍 - 정진혁 분홍이라는 말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분홍으로 산다는 건 달콤하게 익어 가는 것 내 눈과 내 낱말들이 누군가의 한 잎 속에서 산다는 것 당신의 한 잎은 온통 숨결이어서 마음을 실어 나르는 수레여서 분홍 잎맥을 따라 스며든 시간들 사이여서 날마다 분홍 안에서 익숙해지는 몸짓 분홍을 입어요, 분홍을 먹어요, 분홍을 춤춰요 분홍은 나를 얼마나 멀리 밀고 가는지 있잖아요, 그거 알아요? 청평이라든지 덕적도 여수 부산 통영 무의도 같은 지명을 여기선 다들 분홍이라 불러요 한여름 배롱나무 산딸기 복숭아 떨어지는 꽃잎도 나는 분홍이라 불러요 분홍에서만 나를 느낄 수 있으니 뒤집혀도 분홍 분홍과 분홍 사이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둥긂이 되었지요 있잖아요 분홍 한 장을 넘기며 가장 낮은 곳 ..

한줄 詩 2020.09.02

자서전 - 이우근

자서전 - 이우근 가을비 같았고 깨소금 같았고 은박지 같았고 시금치 같았고 찬물 한 그릇 같았다, 고 싶었던 스무 살 무렵도 있었습니다 이후로 지금까지 형편없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입니다 그렇지만 그냥 팽개칠 수는 없습니다 떠밀려 가더라도 손 내밀고, 혹은 끌려가더라도 드러누워 버팁니다 다만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지켜봅니다 그 마음의 부동자세, 지속적이고 싶은, 다만 간절함으로. *시집/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도서출판 선 낙화(洛花) - 이우근 피는 꽃과 더불어 지는 꽃이 있어, 주류(主流)에서 벗어나 추방을 당하며, 시절과 기후를 감지하여 혹은 생육에 밀려 낙하할 때, 단말마의 항변과 야유가 퇴행이 아님을, 그 꽃은 알고 잎은 알고 본질인 나무는 알리라 달콤한 열매에의 그 긴 시간의 ..

한줄 詩 2020.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