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어느 낯 뜨거운 날의 상념 - 윤일균

어느 낯 뜨거운 날의 상념 - 윤일균 파리에 달라붙은 개미 맥없이 손가락으로 개미를 비빈다 부슬비 오는 마당을 지렁이가 기어간다 맥없이 구두발로 지렁이를 밟는다 이슬에 젖은 쌀잠자리 꼬리를 잘라 맥없이 시집을 보낸다 살다가 보니 살다가 보니 이땅에 내가 개미요 지렁이요 잠자리인 것을 집개미 무리 지어 꿀병을 넘나 들고 지렁이 어린 동생 고추 끝을 쏜대도 잠자리동동 파리동동 날아들어도 너희들이 나인 것을 내가 너희들인 것을 *시집/ 돌모루 구렁이가 우는 날에는/ 도서출판b 꽃밥 - 윤일균 말복 되도록 이슬로 연명하는 잡초 여전한 마른장마 해 뜨자 숨 턱턱 막히는 또 하루 밥 푼다 몽골인 고려인 러시아인 서성대는 궁핍한 거리에서 한두 끼 허기 달래기도 버거운 눈빛들 서성이는 거리에서 땀 젖은 밥을 푼다 힘 ..

한줄 詩 2020.08.19

허공, 근육을 만드는 - 김성장

허공, 근육을 만드는 - 김성장 남자가 정자의 동쪽에 앉아 있었다 홀로였다 등이 주민증처럼 휘었다 느티나무 잎 하나가 신화의 속도로 땅에 이를 무렵 한 여자가 정자의 서쪽에 와서 앉았다 몇 도쯤 기울어진 시선으로 구절초를 보는 듯했다 남자가 홀로 있을 때 등은 다만 휘어진 주민등록증 곡선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여자가 등을 맞대는 순간 서서히 허공이 끼어들었다 어느 쪽에서 먼저 근육이 자라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등과 등을 이으며 근육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홀로 남자였을 때 그는 등을 강조하지 않았다 여자가 와서 반대 방향을 보고 앉는 순간 남자가 허공을 향하여 등을 꺼내 보이고 여자는 자기 등을 가지고 와서 거기 앉은 거였다 허공이 두 개의 등을 끌어당겨 근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문제는 허공..

한줄 詩 2020.08.19

그러는 동안 - 이운진

그러는 동안 - 이운진 돌보지 않은 사과알들이 떨어지고 떨어진 사과알이 썩어가고 그러는 동안 썩은 사과 속 벌레의 집에서 벌레가 태어나고 벌레는 다른 집을 지을 다른 사과나무를 찾아 나서고 그러는 동안 돌보지 못한 내 삶이 사과알처럼 떨어져 가슴속에서 썩어가고 슬픈 것을 너무 많이 보아서 슬퍼진 눈에 세상은 온통 벌레의 집이다 썩은 가슴으로만 얻을 수 있는 오로지 치욕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기에 나는 이토록 많은 하루를 사과알처럼 떨어뜨려야 하는지 저 멀리 다른 땅 다른 사과나무에서 꽃이 피고 향기를 머금으며 떨어질 사과를 키우는 건 또 누구의 뜻인지 오늘도 사과나무는 붉은 과즙을 익힌다 나도 외로움의 껍질로 나를 감는다 그러는 동안 이 세상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고도 가득히 햇살이 쏟아진다 사..

한줄 詩 2020.08.18

마른 치자꽃을 위한 노래 - 김인자

마른 치자꽃을 위한 노래 - 김인자 그도 한때는 매혹이었을 꽃 진 자리마다 가득한 향기 밤새 쓴 문장의 파지들이 시나브로 널려있는 책상 떠나기 전 화분에 묻고 왔을 작은 약속 하나 가지를 떠나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도 몸은 땅에 두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와 연락이 끊긴 지 며칠째 피안과 차안을 넘나드는 저 마른 꽃의 잔향 잉여의 시간들 창으로 스민 얇은 햇살이 꽃이 잠들어있는 서재를 기웃댄다 꽃이 꽃다운 건 스스로 눈물을 닦을 줄 안다는 것 그러나 끝내 자신이 꽃인 줄 몰랐기에 꽃일 수밖에 없는 꽃 그도 처음엔 아무것도 모른 채 등 떠밀려온 여리디여린 싹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꽃으로 불리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치자꽃이 되었을 것이다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애월(涯月) - 김인자 그러니..

한줄 詩 2020.08.18

슬픔에게 - 권혁소

슬픔에게 - 권혁소 무지 때문이 아니라 희망에서 비롯된다 모든 슬픔은 처음이라는 기대와 마지막이라는 애절함이 슬픔의 기원이었음을 알았을 때 너도 나도 다시는이라는 단서를 달아 각오를 한다, 이제 더는 희망 같은 거와 속삭이지 말자고 그럴 때 삶은 주저앉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슬픔의 이면에는 어떤 단단함도 있어서 신발을 꺾어 신고서라도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나아간다, 생애 첫 다른 흔적을 남기며 그대 차가운 손을 덥히던 어떤 온기 같은 것 슬픔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슬픔아 부디 오래오래 머물러다오, 슬픔 너는 희망의 다른 이름 아니더냐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우리가 너무 가엾다 - 권혁소 배롱나무를 좋아하는데, 감나무도 한두 그루 있다면 좋겠는데 주춧돌 세운 여기는 배롱나무도 감나무도 뿌..

한줄 詩 2020.08.17

정거장은 한 세계다 - 한관식

정거장은 한 세계다 - 한관식 풍경이 정물처럼 멈췄다 갈라진 안과 밖으로 염치없이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늘은 맑았고 구두는 반짝거리며 자유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무료한 산새의 울음이 희미하게 이정표에 대롱거렸다 그 푸르고 역동적인 바람은 포플러 잎새를 다녀갔다 나는 쓸쓸하였다 오랫동안 비워진 공간을 채우기 위해 생성과 소멸이 도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거친 열정으로 먼 바다를 꿈꾸던 청년은 어디가고 정거장에서 혼자 서성이는가 듣는가 그대여, 바람을 안은 풀꽃은 아스팔트길의 끝을 찾아 두런거리고 무너져 내린 흙벽을 통해 소통하는 자유의 숨결 가거라 아직 생애는 바닥을 보이지 않았다 실핏줄처럼 얽힌 인연을 안고 돌아올 고향과 함께 느릿한 희망에도 미소 지으며 저기 버스가 온다 *시집/ 비껴가는 역에..

한줄 詩 2020.08.17

후유증 - 전영관

후유증 - 전영관 불행은 물고기 눈 같은 것 덮어지지도 않고 잠들지도 못한다 제 당혹에 맞는 피난처가 없는지 바람은 몸부림치며 골목을 휘젓는다 유연한 척하는 고양이 걸음에서 적응을 거듭한 애틋함을 공감한다 마비로 몸이 기울어질 때마다 한탄만 했다 고양이 눈은 현실의 두려움이 응집되는 초점 살아내는 모든 것들의 불안을 암시한다 아침마다 체육관에서 애를 써도 잠만 자는 고양이만큼 유연해지지 않아서 졸렬하게도 그 몸짓을 부러워했다 걸을 때마다 걸음의 리듬을 배반하는 왼발의 후유증 때문에 재활 의지를 의심받고 의료용 긍정을 한 다발씩 처방받았다 야린 이파리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건강해진 동네 공원 제 존재를 증명하려면 더욱 차가워져야 하는 눈사람이 된 양 피가 돌지 않아 차가운 왼발을 뭉치듯 주무른다 왼쪽만 닳은..

한줄 詩 2020.08.12

슬픈 영화 - 이철수

슬픈 영화 - 이철수 -대인동 별들의 고향 지나 영자의 전성시대가 끝나고 , 그때 사라진 대한극장 뒷길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맨발의 청춘들이 몇 장, 추억의 찌라시가 되어 침침한 가등 아래 두근두근 암표상처럼 서성이고 있다네 예고편도 없이 너무 쉽게 열려버린 생의 안쪽 문은 다시 잠글 수 없고 얼룩진 꽃무늬 벽지처럼 눅진한 자폐의 얼굴들만 희멀거니 낮달이 되어 떠도는 골목 언제나 밤보다 먼저 찾아온 어둠이 마른 지푸라기처럼 몸을 뒤척이는 살구나무집 쪽방, 때 절은 암막커튼 뒤에서 동시 상영되는 영화, 어룽어룽 달그림자 아래 푸석하게 빛이 바랜 스카프들이 바닥 없는 낡은 뱃전에 기대어 고단한 날개로 닻을 내린 갈매기 항구 너무 무거워서 빠르게 잠겨버린 생이 스스로 결박을 풀지 못해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

한줄 詩 2020.08.12

보험은 말씀처럼 - 정병근

보험은 말씀처럼 - 정병근 보험 광고의 예언에 의하면 나는 언젠가는 사고를 당하거나 아플 것이고 그래서 가족들을 고생시킬 것이고 또박또박 예비하지 못한 인생 때문에 살면서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고 그리하여 이래저래 나의 말년은 가파를 것이 뻔하고 이미 내일인 오늘을 후회할 것이고 그것 보란 듯이 나는 불행한 자의 모법이 되어 구질구질하게 살다가 내가, 내가 아니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죽어갈 것이다 아니라고 생각해 보지만, 보험은 줄기차게 나의 불행을 입도선매한다 유비무환을 한 귀로 흘린 자 삼가지 않고 섬기지 않은 자 함부로 웃다가 아무렇게나 죽어버리는 *시집/ 눈과 도끼/ 천년의시작 선인(善人) - 정병근 보일러가 고장 나서 사람을 불렀다. 노랑머리에 챙 모자를 쓴 청년이 불..

한줄 詩 2020.08.11

소보로빵 - 김옥종

소보로빵 - 김옥종 공사장 철제 사다리 위에서 떨어져 뇌를 다쳤다던 영광 아재는 새벽 두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소보로 빵을 뜯어 잡수신다 보름 동안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나는 부시럭거림과 동시에 튀어 오르는 아픈 냄새가 반대편 병상에서 화투패처럼 날아오면 그제서야 살고 싶어졌다 아니 빵을 먹고 싶어졌다 아재는 세 번째 봉지를 마저 뜯어 배가 불러오고 내 배는 늑막까지 복수로 차올랐다 아재는 살기 위해 먹지만 나는 먹기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 뇌가 차갑게 인식하면 생이 뜨겁게 반응한다 밤새 창문에 쏟아 붓던 수액이 폐를 적시고 호랑이 장가가는 비가 내려 묵은 먼지가 아침 햇살 사이로 날아오르면 구름이 만들어놓은 부스러기 곰보빵과 생크림 사이 딸기 얹은 소보로와 조청 묻힌 쑥꿀레가 봄볕에 버짐처럼 혈관을 ..

한줄 詩 2020.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