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다시 가을 - 김남조

다시 가을 - 김남조 다시 가을입니다 긴 꼬리연이 공중에 연필 그림을 그립니다 아름다워서 고맙습니다 우리의 복입니다 가을엔 이별도 눈부십니다 연인들의 가슴앓이도 지금 세상에선 수려한 작품입니다 다시 만나려는 나의 축원도 가을이어서 진심이 한도에 닿았습니다 그간에 여러 번 가을이 다녀갔는데 또 가을이 수북하게 왔습니다 이래도 되는지요 빛 부시어 과분한 거 아닌지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의 복입니다 *시집/ 사람아, 사람아/ 문학수첩 노년의 날개 - 김남조 삐걱거리는 내 뼈는 몸 안의 자잘한 사슬이며 허허로운 모래밭에 내 순정의 파편들이 쌓이고 그 위에 질펀한 노을 애련하구나 늙는 일 서툴러서 깃털 줄어도 더 줄어도 날아오르려 애쓰는 내 노년의 날개

한줄 詩 2020.09.23

타원에 가까운 - 강혜빈

타원에 가까운 - 강혜빈 ​ 정원을 반 바퀴 도는 데 두 계절 ​ 당분간 입에서 풀냄새가 나도 괜찮니? 잘 봐, 기대와 실망을 한 군데에 심으면 얼마나 잘 자라는지 무른 말에도 잘 베이는 나뭇잎들은 어떻게 초록인지 ​ 구멍 난 하루를 걸치고 나서는 산책 흰 조랑말들의 발자국이 만든 밤은 길었어 나와 친해진 것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곳에서 잘 얼었지 ​ 뾰족한 얼음들을 재워놓고 내가 나인 것을 참아보기로 했어 칭찬을 한 잔 마시고 싶거든 기다란 혀를 감추고 정확하게 웃어봐 ​ 너의 끝과 나의 끝은 일직선으로 달라질 수 있어 너무 넓어서 슬픈 정원은 형용사가 될 수 있어 이별은 한 마디의 음절만 가질 수 있어 ​ 우리를 한 군데에 심으면 누구부터 시들까? 아무렇게나 자란 마음에게는 차가운 물이 좋아 소심한 게..

한줄 詩 2020.09.22

눈먼 치정 - 이소연

눈먼 치정 - 이소연 피 터지도록 싸우고 발바닥공원을 지나는데 사이사이 놓여 있는 빈 벤치들 숲속도서관은 문이 닫혔고 야외무대의 음악회마저 무기한 연기된 발바닥과 발바닥이 번갈아 기록하는 별 볼 일 없는 산책 한 번 속고 또 속고 권태에 빠진 일상은 도도하지만 나는 기어코 동사무소엘 간다 혼인신고 출생신고 전입신고도 했으니 남편도 신고해 볼까 하고 말 하나가 가슴에 창을 내고, 그 창에 화염이 어릴 때, 불구덩이 속에서 새도 죽고 구더기도 죽는 순간 나도 죽었는데 욕지거리하며 문밖으로 나간 그림자만 살아 있다 나는 그림자마저 산 채로 묻어버릴 거다 늘상 중얼거리는, 나무 뒤편에서 낄낄거리는 꽃잎들이 불쾌하다 팔 다리 뒤엉켜버리는 이 터무니없는 간격을 왜 그리도 사랑했을까 이혼서류에 들어앉은 참새 소리는 ..

한줄 詩 2020.09.22

줄포의 새벽 - 김윤배

줄포의 새벽 - 김윤배 줄포의 새벽은 이슬로 시작된다 이슬의 일생은 절망의 한나절이 아니다 한나절은 죽음으로 이루어낸 황홀한 소멸과 슬픈 귀환 사이에 있다 건너다보면 아릿하지만 마주서면 따스해서 서러운 -바다와 사람 사이 사이에 얼마나 많은 초혼의 눈물이 누워 있는지 만월은 안다 사이를 노래하기 위해 바람은 파도 위의 흐린 섬들을 순례한다 사이에 어둔 사람을 놓고 붉은 하늘을 놓는다 저 안타까운 몸짓들, 생각들, 말들이 필생이라면 한 사람을 미친듯 따라나선 줄포의 새벽이어도 좋았다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휴먼앤북스 카사블랑카의 밀항 - 김윤배 내 밀항 음모는 늘 조명 낮은 째즈카페였다 모든 인연은 카사블랑카에서 시작되었다 흑백 필름은 세상을 밝음과 어둠으로 나눈다 나는 어둠이었다 밀항을 ..

한줄 詩 2020.09.21

빚으로 빚는 생(生) - 김이하

빚으로 빚는 생(生) - 김이하 한때 야무진 꿈도 없었을 것 같은 이 허우대를 이끌고 가는 것은 빚의 힘이다 감감하던 세월이 이젠 겅중겅중 나를 뛰어넘으며 더는 끌고 갈 힘도 없는 나를 잡아끄는 하루 차라리 그 그림자에게 비굴한 사정이라도 하고 싶은 또 하루 그동안 먹고 싼 것들은 이미 하수구로 흘러가 버렸는데 외상값은 카드 명세서에 빼놓지 않고 박혀 있다 아득한 돈의 숫자들 돈을 빼어다 쓸 일도 하지 못했고 그나마 가망도 없이 하염없이 구원의 목소리를 기다리다 지쳐 이제는 웃음거리나 찾다 누워 버렸는데 엊그제 산에서 본 뿌리 뽑힌 나무처럼 나도 어느 결에 꽈당 무너지고 싶다 태풍이라도 오는 날 그 언덕에 서서 내가 봐도 선하게 남아 있을 마지막 그 모습 어느 날 다시 길을 간다면 몸 하나 누일 그런 곳..

한줄 詩 2020.09.21

여전히 개 같은 날들의 기록 - 김왕노

여전히 개 같은 날들의 기록 - 김왕노 개 같은 날들을 기록하는 사내가 있다. 시골로 내려가 파초 이파리에 새파란 하늘 모서리에 허기지나 빈틈없는 정신으로 전심전력으로 개 같은 날이므로 세상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명아주 그림자처럼 흔들리다가 세상에 저런, 저런 하다가 인간 말종들이라 하다가 그는 한 몸이 된 듯 앉은 의자에서 개 같은 날을 기록한다. 청무 굵어갈 때 논병아리 우는 날에도 기록한다.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는 개 같은 놈 자신도 언젠가 반드시 피눈물 흘리게 될 것이라며 내 울던 골에 너도 울게 될 거라며 벼가 끝없이 물결치는 벌판 위에다 모호한 안개에다 소쩍새 울음 위에 경칩이 뜨거운 울음 속에 개 같은 날을 천천히 기록하는 것이다. 잉크 같은 가슴에 펜을 푹 담갔다가 기록하는 것이다..

한줄 詩 2020.09.20

램프의 사내 - 정병근

램프의 사내 - 정병근 밥과 설거지를 하기로 했다 대의를 좇아 30년을 떠돈 끝이었다 서쪽에서 해가 뜨고 염소가 나무에 오를 일이었다 아내는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퇴근 때마다 가지런한 그릇들을 보고 뜨악해했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내가 설거지한 흔적을 탐색했다 나는 검열을 앞둔 군대처럼 싱크대 구석구석까지 말끔하게 닦아놓았다 밥솥을 씻고 밥도 지어놓았다 아내는 지휘관의 표정으로 의기양양해했지만 한두 달이 지나자 조금 어두워지면서 컵이나 음식 쓰레기 같은 걸로 꼬투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당신은 이제 평생 설거지 안 해도 돼, 이런 말끝에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아내도 눈이 빨개졌다 나를 추궁할 일이 설거지밖에 없는 아내여. 말을 뺏기고 정치라곤 나밖에 모르는 사람아, 얼떨결에 노역의 한구석을 잃은 아내..

한줄 詩 2020.09.20

이사 - 조우연

이사 - 조우연 겨우내 그려낸 천장 곰팡이 구름 아래로 그늘 없이 날아가는 어린 딸애의 비행기 벽화는 그냥 두고 간다 죽자고 올라서던 베란다 난간 위에 뜨던 달 그건 어차피 이 집에서 들어올 때부터 있던 거다 부엌과 화장실의 근접, 강장동물처럼 구토와 배설을 식음과 혼돈했던 버릇은 잘 묶어 문가에 내논다 밤마다 여자의 얼굴에 푸른 절망을 새기던 304호 남자의 망치는 돌려주었나 짐을 다 싸고 306호의 늙은 여자가 준 무장아찌에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아들이 다녀간 날 신발장에 남은 숨을 매단 그녀를 빈 그릇째 태우고 간다 그렇게 떠난다, 그런데도 미어질 듯 용달은 흔들리고 집은 부동산이 아니다 *시집/ 폭우반점/ 문학의전당 면목동 반지하 - 조우연 밀린 세를 받으러 갔네 반지하 셋방이 잠수정처럼 어둠에 ..

한줄 詩 2020.09.19

내 삶을 누군가 대신 꺼내 쓰고 있다 - 이병률

내 삶을 누군가 대신 꺼내 쓰고 있다 - 이병률 내 삶을 누군가 대신 살아주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몇 초만큼도 안 되는 내 하루는 아무 쓸모가 없거나 사나흘에 한 번쯤은 비겁하기도 하니까 우연히 잡힌 라디오 전파와 그 전파를 다시는 잡지 못하는 날들 누구는 그 전파를 나 대신 사용하겠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질문 혹은 대답 누구는 그 질문과 대답으로 며칠을 살겠지 인생을 나 스스로 살아가는 사막과 누가 대신 살아주는 남극 그 둘의 배합으로 버무려진다 인류가 울음과 기후의 사용을 멈추지 않았듯이 한사코 불속으로 들어가 불속에서 뭔가를 꺼내들고 걸어나오는 사람은 내 삶을 대신 살아주느라 불을 덮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토록 살고 있는 것은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는 ..

한줄 詩 2020.09.19

해양극장 버스정류소 - 박서영

해양극장 버스정류소 - 박서영 이 도시에 바다가 있다고 했지만 바다는 군인의 것, 벚꽃은 연인들의 것 벚꽃 핀 나무 아래 버스 정류소에서 연인들은 꽃의 눈을 감겨주며 헤어졌고 타지에서 온 사람은 극장이 어디 있나 찾게 되지만 한때 바다극장이 있었다는 풍문만 떠돌 뿐, 소문은 무엇이든 닿기만 하면 아름답게 변하고 추억을 소환해오지요 꽃의 정령이 있는 것처럼 소문에도 정령들이 살아요 끝난 이야기를 끝없이 동시 상영하는 극장은 가열하면 할수록 물방울이 맺혀요 여전히 군인들은 바닷물 속에 빠진 군화를 신고 애인을 만나러 나오지요 아, 현수막도 하나 붙어 있군요 잭나이프를 소지하는 것은 불법이니 조심하세요 떠돌고 있는 이야기를 불 곁에 오래 두면 물방울이 맺히고 흰 시간들이 남아요 군인이 살고 있다는 바다가 어디..

한줄 詩 2020.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