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바람의 소풍길 - 이철수

바람의 소풍길 - 이철수 인생은 재생되지 않는다는 걸 풍매화 쓸쓸한 눈빛으로 읽고 갈 때 울컥 제 삶을 다 쏟아놓고 진저리치는 동백, 에둘러 가는 저이는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어떤 생이라도 기꺼이 복사할 수 있다면 융숭 깊은 이 봄날의 온기를 끓여 장을 담겠네 이번 생에 불려나온 햇나비처럼 가벼이 발뒤꿈치를 들고 길 떠나는 그대여, 어느 시절은 무릉도원 덜큰한 도화 아래 뒹굴다 가고 어느 날은 건널 수 없는 진창의 에움길을 돌고 돌아왔으니 개털 같은 유랑의 날들 한 줌 시래기같이 부서지던 헛헛한 사랑아, 이제 바람이 잔 저녁, 빈손으로 떠나는 황혼역에서 차표를 사고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들국같이 쓸쓸한 마음을 흔들며 그대 다녀간 세상의 길들을 헤아려 보네 *시집/ 무서운 밥/ 문학의전당 내 영혼..

한줄 詩 2020.10.09

가을의 드므 - 성선경

가을의 드므 - 성선경 반소매에 스친 바람 기운이 서늘하니 기러기 그림자에 단풍이 더욱 붉고 지난 무더위는 어떻게 잘 이겼는지 구철초가 피자 소식 없는 친구가 그립다 하늘이 높고 까치 소리 맑으니 멀리 있는 자식이 더욱 보고파라 국 한 그릇, 밥 한 그릇, 간장 한 종지 해도 저물기 전에 서둘러 저녁을 마주하니 백일홍은 백 일도 되기 전에 벌써 지고 국화 분 유유히 저 혼자 향기로워 숭늉 한 대접에 벌써 달이 뜬다 쓸데없는 나이를 자꾸 먹으니 반주 없이도 취기가 돌아 내일은 꼭 한번 고향엘 다녀오리라 섬섬히 궁핍한 마음을 내자, 생각의 벽에 걸린 그림에 댓잎 소리가 쏴 하다. *시집/ 네가 청둥오리였을 때 나는 무엇이었을까/ 파란출판 한참 - 성선경 내가 너에게 가는 길은 멀고 멀어 한참 걷고 걸어도 닿..

한줄 詩 2020.10.09

가위 - 류성훈

가위 - 류성훈 태어났지만 생이 없던 첫 누나였을까 생은 있지만 태어나지 못하는 나였을까 저승이 모두를 잘 먹일 순 없겠지만 얼핏 보이고 들릴 때가 있어, 미래의 신이 키가 큰 건 죽음이 삶보다 더 길어서겠지 얼굴이 없는 사람을 보았다 세상엔 공포나 고독처럼 평등한 것들도 많아 죽은 시간에 찾아와 나를 넘어 다니던 그는 저보다 나이 먹은 나를 보면서 첫울음 앞에선 세상에 온 걸 환영하면서 돌아갔을 때는 편히 쉴 것을 안도하면서 이제 산 자들에게만 기도하는 나를 본다 우리는 천국에 대해 뭐라고 해야 할까 면목이 없는 세계를 대신해 나는 아직도 말로만 마중하는 것일 테다 안녕, 아직는 잘 지낼 *시집/ 보이저 1호에게/ 파란출판 상 - 류성훈 돌본다는 건 심장에 깊어지는 못이었다 사월이 개화 순서를 놓치면 ..

한줄 詩 2020.10.08

재앙의 환대 - 백무산

재앙의 환대 - 백무산 팔을 다쳐 깁스를 하고 오니 너나없이 반긴다 염려가 아니고 환대다 식당 여자는 껴안을 듯이 두 팔을 내밀고 데면데면하던 이웃도 나를 보더니 얼굴을 편다 좌회전하던 먼 이웃도 우회전하며 손을 내민다 혁대 풀고 거웃까지 보여 가며 봐봐 나도 석달 고생했다고 한여름에 얼마나 개고생이냐고 운전은 되냐고 팔 아니라 대가리였으면 좆 됐을 거 아니냐고 말은 그렇지만 정작 재앙의 기억들을 떠올렸을 것 재앙이 가져다준 새잎 기억들을 탈 없기를 원하지만 말짱한 것은 뻔뻔한 콘크리트 망가진 뒤에야 간신히 새잎이 연다는 걸 지난날의 우리가 부서지지 않았더라면 별들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라는 거울 앞에 내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가까운 죽음 나의 죽음이 기다리지 않는다면 미래가 말짱할..

한줄 詩 2020.10.07

수미산 엘레지 - 이정훈

수미산 엘레지 - 이정훈 좌골신경통 도진 엄마가 비스듬한 개수대를 붙들고 --손이 내 딸보다 낫다 애고 어머이, 아무려면 '손'과 '딸'보단 나은 것들 생각으로 어물어물 내빼려다 시집간 딸보다 내 말 들어주고 아들 호박죽도 끓여 먹이는 이 북두갈고리가 신통하지 않으냐 귀를 잡혀 밥상으로 붙들려 오네 속을 다 퍼내 쭈그렁 껍질만 남은 손이 주걱도 삽도 되어본 적 없는 손 방바닥에 깔게 하시네 남의 눈물 수미산 아래 혼자나 질금거려 가짜 슬픔 가짜 사랑에 밑천 빠지는 이 습성까지 짐작하셨는가 더 먹어둬라, 한국자 비워내면 두국자로 채워주시는 손바닥 앞에서 십리 장터 싸돌다 온 수캐 넙죽 죽사발이나 핥다 오는 밤 손아귀처럼 따신 호박죽 봉다리를 꼭 쥐어주며 어여 가라고 또 가라고 오래전에 추석이나 쇠고 가듯 ..

한줄 詩 2020.10.07

구름의 변명 - 박태건

구름의 변명 - 박태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하는 것은 떠나보내는 것 바람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 집 없는 새의 영혼처럼 여름날 쿵쿵 다가오는 우레의 발소리에 서툰, 빗방울로 사라지는 것 세상의 초록들에게 더 이상 마음 주지 않을 것 그리하여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 가령 하느님이 기다란 손톱 끝으로 쓱, 그어놓은 신작로라든가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는 것 하늘의 문장을 몰래 써 놓았다가 비행운처럼 지워버리는 것 한때 내 안에 있던 불꽃을 생각하지 않는 것 한 조각 떠도는 구름의 숙소가 내 유일한 거처일지라도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 모악 구부러진, 힘 - 박태건 손바닥을 펼치자 총각 "인생이 참 기구하구먼!" 육교가 있던 자리 새점을 ..

한줄 詩 2020.10.06

너무 시끄러운 적막 - 고재종

너무 시끄러운 적막 - 고재종 박새가 확독에 고인 물을 찍고 날아가며 휘익, 살같이 흘러가는 날을 그어 대는가 뒤란 대울타리 댓잎은 스적이며 외로운 것들은 서로 비비며 운다는 것일까 고양이가 폴짝 뛰어올라 고추잠자리를 놓치며 이곳이 꿈의 마당은 아니라고 하건 말건 나는 이덕무의 간서치 흉내를 좀 내보는데 이 집에 살았으나 바람이 된 귀신들이 일전부터 몰려와 세간살이와 자꾸 수작질한다 그 소리에 화들짝 깨어나는 건 맨드라미, 붉은빛에 사무쳐서 대문 쪽을 돌아보는데 무슨 유령이라도 되는지 슬그머니 들어서는 어제 딴 강냉이를 쪄서 가져온 정오(正午), 토방의 개는 무슨 할 말이 저리 많은가 반나절도 시끄러운데, 지친 진초록의 적막은 왜 유모차 미는 노인의 꼽등이에 켜켜이 쌓일까 *시집/ 고요를 시청하다/ 문학..

한줄 詩 2020.10.06

끈질긴 일 - 이돈형

끈질긴 일 - 이돈형 나는 불길함에 그을려 닦아내도 보이지 않는 여전히 나의 천적은 나라서 우연한 저녁과 사투를 벌이다 천천히 그러나 오랫동안 어둠에 투항하고 있다 불을 데려오지 못하면 어쩌나 너는 견고한 책상에 앉아 미래는 꿈 깬 자의 것이라는 강변을 이면지에 깨알같이 쓰고 있겠지만 나는 미신이 믿을 만했다 흰여우처럼 출몰해 온통 흰에 흰빛으로 뒤덮인 이면보다는 노동에 깔려 말해줄 수 있는 게 이 저녁이 악다구니 쓰는 문패 같다는 아비의 억양에 위로받다가 한번 놀란 아비처럼 무서운 가방을 둘러메고 나오는 너에게 이리 온 이리 온 벌린 팔에서 지린내가 난다 불을 데려가지 못면 어쩌나 끈질긴 일이었지만 너는 상의도 없이 불길함에 타죽은 것들을 하나씩 들춰보며 지나갔다 나를 빼놓지 않고 지나가 어둠을 삼킬 ..

한줄 詩 2020.10.05

어찌할 수 없는 한순간 - 김이하

어찌할 수 없는 한순간 - 김이하 아침에 한 사내가 죽었다는 기별이 왔다 간밤엔 그가 어느 건물의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는, 이 땅덩이가 움찔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는구나, 마음 끝자락 하나 기댈 수 없어 가는구나 싶어 한없이 우울한 가을빛이 창을 가득 메운다 저 푸른 하늘은 왜, 쓸쓸한가 가슴 깊은 곳의 눈물까지 길어 올리는가 퍼렇게 멍든 마음들 하나의 바람으로 꺽꺽 울며 외치는 시위(示威)구나 싶은데 살고 싶어 죽을 만큼 소리치는 아우성이라 하고 싶은데 혹은 개새끼라 욕하는 울근불근 악다구니라 하고 싶은데 이젠 찬 기운 스미는 방문을 열고 거리로 나설 힘도 남지 않았다 이렇게 스러질 것인가, 소멸을 준비해야 하는가 가슴에 새긴 바람은 너무나 뚜렷한데, 더욱 뚜렷해지는데 버티고 서 있어야 할 힘은 겨우 ..

한줄 詩 2020.10.05

김 씨의 당부 - 서영택

김 씨의 당부 - 서영택 혼불은 제 몸을 태워서 불꽃을 피는구나 장작을 넣자 불꽃 화르락 일어서다 앉는다 김 씨는 북망산 가려고 저 나무를 베지는 않았을 것 북어처럼 서걱서걱 소리를 내고는 했다 김 씨는 이빨 보이고 웃는다 "내 인생 마지막 환하게 살다 가네" 마주 앉은 백구가 꼬리를 흔든다 이름 없이 생을 전전하더니 죽어서도 그냥 김 씨였던 그 영정사진이 걸어와 툭툭 손을 털었다 양은 사발에 막걸리를 따른다 "회포들 풀어, 댕기러 오느라 고맙네 나는 북망산이 세 걸음, 자네들은 열 걸음 산 입에 거미줄 치지 말고 신발이나 잘 챙겨 가게나" *시집/ 돌 속의 울음/ 서정시학 구룡마을 - 서영택 꿈에서 깬 나무들이 감추고 있던 말들을 쏟아낸다 냉장고는 휘파람을 불고 프랫카드가 바닥을 뒹굴고 있다 골목은 이..

한줄 詩 2020.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