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빚으로 빚는 생(生) - 김이하

마루안 2020. 9. 21. 22:10

 

 

빚으로 빚는 생(生) - 김이하

 


한때 야무진 꿈도 없었을 것 같은
이 허우대를 이끌고 가는 것은 빚의 힘이다

감감하던 세월이
이젠 겅중겅중 나를 뛰어넘으며
더는 끌고 갈 힘도 없는 나를 잡아끄는 하루
차라리 그 그림자에게 비굴한 사정이라도 하고 싶은
또 하루

그동안 먹고 싼 것들은 이미
하수구로 흘러가 버렸는데
외상값은 카드 명세서에 빼놓지 않고 박혀 있다
아득한 돈의 숫자들

돈을 빼어다 쓸 일도 하지 못했고
그나마 가망도 없이
하염없이 구원의 목소리를 기다리다 지쳐
이제는 웃음거리나 찾다 누워 버렸는데

엊그제 산에서 본 뿌리 뽑힌 나무처럼
나도 어느 결에 꽈당 무너지고 싶다
태풍이라도 오는 날 그 언덕에 서서
내가 봐도 선하게 남아 있을 마지막 그 모습

어느 날 다시 길을 간다면
몸 하나 누일 그런 곳이나 살펴봐야겠다

 

 

*시집/ 그냥, 그래/ 글상걸상

 

 

 

 

 

 

앞산을 보다 - 김이하

 

 

머릿속엔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저녁

끔벅끔벅 앞산을 바라본다

 

빨간 불빛 깜박깜박

그 산에 빌붙듯이 겹친 건물에서는

십자가 서너 개 어정쩡하게 서 있고

그것을 피하려 마을길로 눈길을 돌리면

심드렁하게 기어가는 자동차 꽁무니에서도

그 불빛 깜박거린다

 

찬바람 간간이 들이친다

지워 버리고 싶은 가족사가 풍경처럼 흔들리며

머리를 울린다, 너무 오래 나를 건드린

가시들이 몰려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창은 닫히겠지만

거울 속에 드러나는 내 뒤의 무성한 가시넝쿨

가족이라는 버거운 파노라마

 

끊임없이 깜박거리는 것들

어떤 신앙도 기도도 위안이 되지 않을 저녁이다

이젠 가족들 멀리 미아(迷兒)가 되어

다만 한 잔 술에

얼굴 가만 적시고 앉아

몸이 먼저 무너지길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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