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전히 개 같은 날들의 기록 - 김왕노

마루안 2020. 9. 20. 19:25

 

 

여전히 개 같은 날들의 기록 - 김왕노

 

 

개 같은 날들을 기록하는 사내가 있다.
시골로 내려가 파초 이파리에 새파란 하늘 모서리에
허기지나 빈틈없는 정신으로 전심전력으로 개 같은 날이므로
세상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명아주 그림자처럼 흔들리다가
세상에 저런, 저런 하다가 인간 말종들이라 하다가
그는 한 몸이 된 듯 앉은 의자에서 개 같은 날을 기록한다.
청무 굵어갈 때 논병아리 우는 날에도 기록한다.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는 개 같은 놈
자신도 언젠가 반드시 피눈물 흘리게 될 것이라며
내 울던 골에 너도 울게 될 거라며
벼가 끝없이 물결치는 벌판 위에다 모호한 안개에다
소쩍새 울음 위에 경칩이 뜨거운 울음 속에
개 같은 날을 천천히 기록하는 것이다.
잉크 같은 가슴에 펜을 푹 담갔다가 기록하는 것이다.
개 같은 날을 보면 울분이 터져 도저히 절필할 수 없다는 사내
여전히 개 같은 날이므로 여전히 기록할 수밖에 없다며
비바람 휘몰아쳐 창문 덜컹거리는 밤도 개 같은 날이라
잠들 수 없다는 사내 심장을 쥐어짜는 고통 속에서
그리움을 환히 밝힌 채 여전히 개 같은 날을 기록하고 있다.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천년의시작

 

 

 

 

 

 

심야극장 앞을 지나며 - 김왕노

 

 

여기서 너는 떠났을 거다.
네가 숨을 멈춘 지 오래이나 극장 앞을 지날 때마다
내 가슴에 촤르르 촤르르 돌아가는 너의 시들
너는 너의 시를 이 세상에 틀러 왔고
나는 너의 푸른 시를 관람하는 것이다.
시적인 것과 시적이 아닌 것으로 나누어진 세상
너의 어느 푸른 저녁을 읽으며
난 시적인 세상으로 안개처럼 스며든다.
빈집이나 잎 속의 검은 잎을 읊으며
언젠나 나의 꽃들이 우수수 질 밤의 난간을 지나간다.
이것은 내가 어느새 너의 푸른 시 세계를 통과해 가는
소리 없는 세기말의 산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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