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해양극장 버스정류소 - 박서영

마루안 2020. 9. 18. 22:25

 

 

해양극장 버스정류소 - 박서영

 

 

이 도시에 바다가 있다고 했지만

바다는 군인의 것, 벚꽃은 연인들의 것

 

벚꽃 핀 나무 아래 버스 정류소에서

연인들은 꽃의 눈을 감겨주며 헤어졌고

 

타지에서 온 사람은 극장이 어디 있나 찾게 되지만

한때 바다극장이 있었다는 풍문만 떠돌 뿐,

소문은 무엇이든 닿기만 하면

아름답게 변하고 추억을 소환해오지요

꽃의 정령이 있는 것처럼

소문에도 정령들이 살아요

끝난 이야기를 끝없이 동시 상영하는 극장은

가열하면 할수록 물방울이 맺혀요

 

여전히 군인들은 바닷물 속에 빠진 군화를 신고

애인을 만나러 나오지요

 

아, 현수막도 하나 붙어 있군요

잭나이프를 소지하는 것은 불법이니 조심하세요

 

떠돌고 있는 이야기를 불 곁에 오래 두면

물방울이 맺히고 흰 시간들이 남아요

군인이 살고 있다는 바다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오전에 연인들은 서로 알았고 오후에는 몰랐지요

 

그래도 벚꽃은 연인들의 것,

버스정류소는 꽃 피고 지는 행성처럼 남아있어요

 

 

*해양극장 버스 정류소: 창원 진해에 있는 버스 정류소

*시집/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문학동네

 

 

 

 

 

 

구름치 버스정류장 - 박서영

 

 

네가 떠나자 빈방이 생겼다고 구름치 버스정류장에 살고 있는 새가 말했다. 어쩌다가 이곳에 살게 되었는지 궁금했으나 그건 내 슬픔과는 무관한 일. 나는 구름치에서 방 한 칸을 구하고 하룻밤 자고 떠나면 그뿐이다. 어쩌다가 내가 이곳에 내리게 되었는지 새는 궁금할 만도 한데, 그건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 새와는 무관한 일. 구름이 구름의 시간을 넘어간다. 구름은 짓다만 집의 창문이 되고, 시골버스에서 내리는 낯선 손님이 되고, 손님은 그 정류장의 이름이 된다. 나는 내린다. 정류장 의자 밑에서 참새들이 날아오른다. 지저귄다. 네가 떠나자 빈방이 하나 생겼을 뿐이라고.

 

 

*구름치: 전남 장흥군 장흥읍 금성2구 구름치마을

 

 

 

 

# 코로나가 너무 많은 일상을 바꿔 놓았다. 국제 하늘 길이 막힌 것은 물론 국내 여행마저 거리두기 때문에 눈치가 보인다. 버스 타고 여행 가기 딱 좋은 요즘이다. 대중 교통은 노인들이나 타는 것으로 전락한 시대에 시인은 언제 이런 여행을 했을까. 한 시간에 하나쯤 오는 시골 버스를 기다리는 맛을 누가 알까. 눈으로든 입으로든 읽을수록 가슴에 스며드는 쓸쓸함이라니,, 이것이 진정한 여행의 맛이다. 이 시집에는 버스 정류장이 들어간 시가 여럿 실렸다. <태양극장 버스 정류소>라는 제목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또한 기 막히게 쓸쓸해서 좋다.

 

 

오래 만났지만 모르는 사람이 된 당신처럼

이 도시의 골목은 낯설다, 산책중에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바람을 만났다

 

(중략)

 

탈 거요? 겨우 만난 눈사람과 함께 머뭇거리는 내게

운전기사가 던지는 한마디

눈사람과 나는 붉게 불타는 머리통을 좌우로 흔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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