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바람을 품은 사내 - 정덕재

바람을 품은 사내 - 정덕재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급해도 걸음은 옮겨지지 않는다 지금 출발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마음은 떠났어도 다리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어보지만 아직 하나를 시작하지 못했다 거친 사막을 견뎌온 사내 세상을 휘젓던 사내 소주 다섯 병을 마시고 새벽처럼 일어나 바람처럼 달려가던 사내 먼저 떠난 여자가 그리워 밤늦게 울던 사내가 풍 맞았다 바람은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한 번 멈춰선 바람은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시집/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걷는사람 콩나물국밥을 먹으며 - 정덕재 아침 6시 15분 그쯤이면 새벽인가 콩나물국밥을 기다리는 사내 셋은 깍두기와 김치를 먹으며 사람 얘기를 한다 취기에 오른 남녀 두 ..

한줄 詩 2020.09.29

구절초 - 김재룡

구절초 - 김재룡 어머니는 여섯 살이 된 나를 데리고 개가했다. 양주 남면에서 광적면으로 이십여 리를 들어가는 삿갓봉 외딴 집이었다. 칠 남매의 둘째가 새아버지였다. 여덟 살과 네 살 위 고모 둘, 두 살 위 삼촌, 한 살 밑 고모를 포함해 모두 열 식구가 한 지붕 밑에 살았다. 이따금 밖으로 떠도는 삼촌이 집에 들르곤 했다. 갖가지 들꽃이 흐드러져 있을 때 여동생을 보았다. 이름이 국화였다. 할아버지는 목수였고 아버지는 정미소 일꾼이었다. 밖으로 떠돌다 어쩌다 집에 들어서는 할아버지는 성미가 고약하고 불같았다. 장마철이면 사랑방에서 문틀을 짜면서 지에미부틀이라는 욕을 입에 달았다. 가끔 작은삼촌이 두들겨 맞았다. 없는 살림에 어머니는 할머니를 설득해 두부 장사를 시작했다. 하루걸러 콩을 불려 맷돌에 갈..

한줄 詩 2020.09.29

맨드라미를 위한 사화(詞話) - 황원교

맨드라미를 위한 사화(詞話) - 황원교 꽃도 제 가슴에 생채기를 낼 수 있다 번갯불처럼 눈을 멀게 하는 꽃 천둥처럼 귓전을 울리는 꽃 눈 마주칠 적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텅 빈 늦가을 뜨락을 지키는 저 외로운 파수꾼이 머리에 이고 지고 있는 붉디붉은 생각들도 차가운 밤이슬에 색이 바래 간다 뜬눈으로 밤을 함께 보내고 아침이면 배갯잇에 머리칼 한 움큼씩 묻어나는 생이여 남은 날은 저 앞산 단풍처럼 물들어 갈 때는 선운사 동백꽃처럼 한 치의 미련 없이 낙하할 수 있게 해다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몸통으로 보도블록 틈새에서 꼿꼿이 버티고 서 있는 눈물겨운 저 고집, 내 아버지의 생을 빼닮은 꽃이여 *시집/ 꿈꾸는 중심/ 도서출판 시가 화덕 앞에서 - 황원교 살아가면서 방화범처럼 세상을 죄다 불 싸지..

한줄 詩 2020.09.29

흔들리는 일 - 이서화

흔들리는 일 - 이서화 어금니 근처의 이빨 하나가 점점 더 심하게 흔들린다 어느 절의 당간지주 못지않은 역할의 기둥이었다 섭식과 씹는 일을 받치고 서있던 막중이었지만 푸성귀조차 힘주어 씹지 못하는 것을 두고 그동안 씹어 삼켰던 것을 생각하면 다름 아닌 기둥 하나를 흔든 일 종래에는 온 기둥을 다 뽑는 일이 나를 먹여 살린 일이었다는 것 세상의 물렁물렁한 일 물렁한 음식 앞에서도 이젠 단단히 각오하라는 뜻 마지막 폐업에 몇 숟가락의 쌀을 넣어주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이다 더 이상 먹여 살릴 일이나 먹고 살 일이 영영 끝난 뒤에도 생쌀을 오래 물고 있을 기둥 없는 폐업처럼 그래서 속수무책이라는 말을 흔들리는 이빨이 지긋이 깨물어 보는 것이다 *시집/ 낮달이 허락도 없이/ 천년의시작 흔들리는 균형 - 이서화 물..

한줄 詩 2020.09.28

단풍이 오는 속도 - 황형철

단풍이 오는 속도 - 황형철 이달 25일 설악산을 출발한 단풍이 광주 무등산에는 다음 달 20일쯤에나 이를 것이라고 한다 백이십 리쯤 될까 자동차로 예닐곱 시간인데 단풍은 부러 산 넘고 물 건너 바위에 앉았다가 구름도 만나고 돌고 돌아 찬찬히 내려온다 너도 단풍처럼 와라 십 리쯤 걷다가 한번 쉬고 또 십 리쯤 걷다가 한번 쉬고 으르렁으르렁 광기의 그것은 냅다 던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툴 것도 없이 기웃거리고 비틀거리고 머뭇도 거려보고 구부정구부정 온몸에 길을 감고 쑥부쟁이와 구절초 감별법도 배워 곰살맞게 말 붙이며 와라 가뿐 산세를 넘는 단풍의 자세도 익히고 물병자리 고래자리 지도 삼아 같은 박동 같은 호흡으로 도처에 흩어진 문장들 나이테처럼 새기며 직립보행으로 와라 단풍도 사람도 매한가지였던 거라 너..

한줄 詩 2020.09.28

고등어 - 박미경

고등어 - 박미경 시장으로 걸어갔다 깊은 바다, 좌판 보인다 부부는 마치 깊은 바닷속을 쉼 없이 헤엄치듯 물기를 머금은 고등어와 갈치를 건져 올리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웃을 뿐 큰소리로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지도 않았다 돈을 담은 고등어 피 말라붙은 압력밥솥 헐거워진 뚜껑으로 빠져나가려는 소금기 돌려 잠그며 너절한 지난날 뜸 들이는 중이다 고등어를 두 동강 내어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눈을 가려 버렸다 나는 지금 고등어 눈을 뜨고 있지 않을까 움직일 수 없다 사람들이 출렁이며 밀려올 때마다 균형을 잡아주던 지느러미와 낙망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던 꼬리가 내장과 함께 제거되어 수북하다 시장으로 허기를 구걸하러 온 것 같은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이 비루한 시간 어쩜 우리는 서로의 허기를 채워주는 것인지..

한줄 詩 2020.09.27

지리멸렬 - 우남정

지리멸렬 - 우남정 화마가 고시원 쪽방에 잠든 노인을 삼켰다 술 취한 자동차가 버스 기다리던 청년을 들이받았다 노인이 치매인 91세 아내의 목을 졸랐다 한 여자는 전 남편의 칼날에 온몸을 찔린 채 주차장에 숨져 있었다 해일이 강타한 바닷가에 겁에 질린 여자가 울고 있었다 몇 놈이 악어에게 먹히는 동안 누 떼들이 핏빛 강을 건너고 있었다 먹방 프로에서는 한 세프가 아귀찜 비법을 떠들고 있었다 홈쇼핑에는 대박을 부추기는 경품 추첨이 한창이었다 꾹.. 꾹.. 꾹.. 채널이 돌아가고 있었다 저녁이 저물고 있다 다행이다 목숨 걸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서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문학의전당 굴헝 - 우남정 저녁이었다 덤불 속 별똥별이 떨어진 자리였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한줄 詩 2020.09.27

흘리고 다닌 것들 - 류정환

흘리고 다닌 것들 - 류정환 나이 겨우 오십 중반인데 뭘 자꾸 흘린다. 반찬을 집어 먹다가도 흘리고 물을 마시다가도 흘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더러는 오줌 누다가도 찔끔찔끔 흘린다. 그러고 보니 애늙은이 짓 삼십 년 이것저것 흘리고 다닌 게 전부라! 청춘을 흩날리는 꽃잎이라 흰소리를 하며 아까운 줄 모르고 흘리고 다녔지. 풍성하던 머리카락도 알게 모르게 다 흘리고 그 밝던 눈도 속없이 빼앗겨서 본데없이 눈앞은 어둡고 귓속에는 사철 매미가 들어앉아 산 지 오래, 여기저기 술값을 흘리고 다니느라 알량한 주머니 그나마도 비고 야무졌던 꿈은 다 어디다 흘려버렸는지 가슴도 헐렁하고 아, 부질없이 흘리고 다닌 말이며 글들은 또 어쩔 것인가! 가뭇없이 흘리고 다닌 것들 저기 어디쯤 저무는 길가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

한줄 詩 2020.09.26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 - 김인자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 - 김인자 첫 결혼기념일이 이혼기념일이 된 후배의 변은 걷잡을 수 없는 남편의 바람기가 원인이란다 40년을 한 남자와 살고 있는 나도 실은 한 남자와 사는 게 아니다 영화나 소설처럼 호시탐탐 친구의 애인을 넘보고 선후배에게 추파를 던지고 이웃사내에게 침을 삼켰다 단언하지만 이런 외식이 없었다면 나야말로 일찍이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 결혼제도란, 한 여자가 한 남자만을 거래할 수 있도록 규정지어진 공소시효가 불분명한 합법을 가장한 희대의 불법 사기극, 나는 달콤한 미끼에 걸려든 망둥어, 위장취업자, 아니 불법체류자, 결혼이라는 기업에 청춘의 이력서를 쓰고 정규직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상근봉사자, 가문의 대소사엔 대를 이은 비정규직 노동자, 자식에겐 만료가 없는..

한줄 詩 2020.09.26

숨어 사는 영혼처럼 - 강인한

숨어 사는 영혼처럼 - 강인한 외딴 섬으로 가는 다리였다. 버스는 오 분쯤 달려 섬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널 때 창밖으로 바다가 아득하였다. 파랗게 보이는 높고 소슬한 하늘, 아래에 어두운 보랏빛, 그 아래 먹구름과 양털구름이 뒤섞이고. 청동의 파도주름과 맑은 햇빛, 색색의 구름들, 높은 데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사이사이 구름을 뚫고 단숨에 꽂히는 바닥은 은빛 바다였다. 햇빛을 줄기줄기 온몸에 받아 적는 보얀 구름커튼에 잡티 하나. 차창에 묻은 티끌일까 손가락으로 헤집는다. 점점 키워보니 아뜩한 하늘에 아, 숨어 사는 영혼처럼 혼자 날고 있는 새였다. *시집/ 두 개의 인상/ 현대시학사 깊은 숯을 마음에 다스리고 - 강인한 산 빛깔이 엷어지고 슬픔은 극약처럼 짙어진다. 몰래 숨어 지켜보는 어떤 눈빛이 ..

한줄 詩 2020.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