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사 - 조우연

마루안 2020. 9. 19. 22:26

 

 

이사 - 조우연


겨우내 그려낸 천장 곰팡이 구름 아래로
그늘 없이 날아가는
어린 딸애의 비행기 벽화는 그냥 두고 간다

죽자고 올라서던 베란다 난간 위에 뜨던 달

그건 어차피 이 집에서 들어올 때부터 있던 거다
부엌과 화장실의 근접, 강장동물처럼
구토와 배설을 식음과 혼돈했던 버릇은
잘 묶어 문가에 내논다
밤마다 여자의 얼굴에 푸른 절망을 새기던
304호 남자의 망치는 돌려주었나
짐을 다 싸고
306호의 늙은 여자가 준 무장아찌에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아들이 다녀간 날
신발장에 남은 숨을 매단 그녀를
빈 그릇째 태우고 간다

그렇게 떠난다, 그런데도
미어질 듯 용달은 흔들리고

집은 부동산이 아니다


*시집/ 폭우반점/ 문학의전당

 

 

 

 

 

 

면목동 반지하 - 조우연


밀린 세를 받으러 갔네
반지하 셋방이
잠수정처럼 어둠에 반쯤 잠겨 있었고
길바닥이 턱밑까지 차올라 있었네
문창살에 매달린 불빛이
제 몸을 채 썰어 도주를 하고 있는 사이
믹스커피 냄새가
천장을 향해 자라난 곰팡이 냄새와
난처하게 섞이고 있었네

반지하 수압에 가자미처럼 납작해진 사람들
일자리를 잃고
더 깊이 모래 속으로 박히고 있는 남자
건조대에 널린 아이들에게서
마른 미역 냄새가 났다
이거 정말
면목 없습니다
면목 없는 남자는
되돌아가는 주인여자를 향해
찬 파도를 맞으며
오래 문을 열고 서 있었다
여자가 올라가는 계단을 비추던
불빛을 거두고 문이 닫혔을 때
출렁
잠시 잠수정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가라앉았다

 

 

 

 

# 조우연 시인은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살고 있다. 2016년 <충북작가>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폭우반점>이 첫 시집이다. <시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