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먼 치정 - 이소연

마루안 2020. 9. 22. 22:06

 

 

눈먼 치정 - 이소연


피 터지도록 싸우고
발바닥공원을 지나는데
사이사이 놓여 있는 빈 벤치들
숲속도서관은 문이 닫혔고
야외무대의 음악회마저 무기한 연기된
발바닥과 발바닥이 번갈아 기록하는
별 볼 일 없는 산책

한 번 속고 또 속고
권태에 빠진 일상은 도도하지만

나는 기어코 동사무소엘 간다
혼인신고 출생신고 전입신고도 했으니 남편도 신고해 볼까 하고

말 하나가 가슴에 창을 내고, 그 창에 화염이 어릴 때,
불구덩이 속에서 새도 죽고 구더기도 죽는 순간
나도 죽었는데
욕지거리하며 문밖으로 나간 그림자만 살아 있다
나는 그림자마저 산 채로 묻어버릴 거다

늘상 중얼거리는, 나무 뒤편에서 낄낄거리는 꽃잎들이
불쾌하다
팔 다리 뒤엉켜버리는 이 터무니없는 간격을 왜 그리도 사랑했을까
이혼서류에 들어앉은 참새 소리는 너무나 밝고

작은 연못의 물결 세우고 건너는 물뱀의
무늬들이 화난 얼굴의 나를 사분대다 놓쳐버릴 때
나는 조금 전 알았던 것을 까먹는다
그러면 마음은, 언제 또 좋은 생활이 올 것인가 또 생각하겠지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걷는사람

 

 

 

 

 

 

연필 - 이소연


정수리부터 갈아 넣지 않으면
어떤 말은 영원한 비밀이 되곤 했다

말 할수록 죽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도 받아 적지 않아서일까?

작은 평수의 임대주택을 생각하면
혼자 울고 있는 부엌과 화장실 문을 마주보는 식탁과
여자를 닮은 연필이 있다

굴러다닐수록 함부로 쓰였다
누구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지하에서 꺼내온 말은 자주 지워졌다

정수리를 찧으며 수명을 읽는다
오래도록

머리가 벗겨지고
뇌가 갈리고
입이 사라진다

하지만 사랑하리라
기필코 사랑하리라

오래전
편지의 쓰고 지운 자국을 읽으려 애쓴 적이 있다

뾰족해지고 싶다는 건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것

생각이 몽땅해진다
비밀이 더러워졌다

 

 

 

# 이소연 시인은 1983년 경북 포항 출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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