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줄포의 새벽 - 김윤배

마루안 2020. 9. 21. 22:27

 

 

줄포의 새벽 - 김윤배


줄포의 새벽은 이슬로 시작된다

이슬의 일생은 절망의 한나절이 아니다
한나절은 죽음으로 이루어낸 황홀한 소멸과 슬픈 귀환 사이에 있다

건너다보면 아릿하지만 마주서면 따스해서 서러운

-바다와 사람 사이

사이에 얼마나 많은 초혼의 눈물이 누워 있는지 만월은 안다
사이를 노래하기 위해 바람은 파도 위의 흐린 섬들을 순례한다
사이에 어둔 사람을 놓고 붉은 하늘을 놓는다

저 안타까운 몸짓들, 생각들, 말들이 필생이라면

한 사람을 미친듯 따라나선 줄포의 새벽이어도 좋았다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휴먼앤북스

 

 

 

 

 

 

카사블랑카의 밀항 - 김윤배


내 밀항 음모는 늘 조명 낮은 째즈카페였다

모든 인연은 카사블랑카에서 시작되었다
흑백 필름은 세상을 밝음과 어둠으로 나눈다
나는 어둠이었다
밀항을 모의하는 자들은 주문하는 술이 다르다
인연은 자막 없는 필름에서부터다
자막은 감옥이기도 하고 소통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감옥을 택했다
나를 가두고 내 안에 인연을 가둘 생각이었다
인연은 붉은 사막을 끌어안는 달빛이었다

붉은 사막은 강한 투지였다
달빛으로 투지가 꺾이곤 했다

달빛을 밀항선에 승선 시킬 수 있을지 두려웠다
배신은 일상이었다 암표는 나쁜 상징이어서
문장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사막 도시가 밤으로 달려갈 때 밀항선에 오를 생각이다
시편마다 밀항이었으니 밀항은 익숙했다

세상 모든 사물로의 밀항은 목숨 걸 때 항로가 열린다

 

 

 

# 김윤배 시인은 1944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한국방송통신대, 고려대 교육대학원 및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겨울 숲에서>, <떠돌이의 노래>, <강 깊은 당신 편지>, <굴욕은 아름답다>, <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 있다>, <슬프도록 비천하고 슬프도록 당당한>, <부론에서 길을 잃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바람의 등을 보았다>,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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