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오늘 하루만이라도 - 황동규 시집

마루안 2020. 12. 7. 22:10

 

 

 

시집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서점으로 달려가 손에 넣은 시집이다. 내가 사랑하는 신촌의 홍익문고다. 최근 외관을 단장했지만 여전히 승강기가 없어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해서 더 좋은 아날로그 서점이다.

 

지난 11월 내내 이 시집과 함께 했다. 읽다가 창밖을 보며 첫눈이라도 내렸으면 하게 만드는 시집이다. 황동규 시인은 1938년 출생이니 팔순을 훌쩍 넘겼다. 선생은 참 많은 시집을 낸 원로 시인이지만 그의 시집을 며칠 동안에 걸쳐 온통 몰입해서 읽은 것은 오랜 만이다.

 

돌아 보면 황동규 시인과는 오랜 인연이 있다. 뭣도 모르고 간 군대에서 황동규 시인을 알았다. 몇 달 앞서 입대한 선임이 시집을 여럿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없이 놀기만 한 청춘이었기에 시를 맛도 모르고 먹는 음식처럼 읽었다. 

 

그중 오규원과 황동규 시집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때가 나의 시 읽기 태동기였다. 이후 읽다가 잊다가 익다가 조금씩 내 방식으로의 시집 읽기가 정립되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서정성 넘치는 제목을 달고 나온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누군가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마당에 서 있던 눈사람이었을까. 매미소리 요란한 한여름 감나무 아래서 누렁이와 낮잠을 자던 시절도 떠오른다.

곱게 늙은 시인의 삶이 온전히 담긴 시집이다.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부지런한 시인임을 알 수 있다. 유독 시인들이 사회부적응자가 많은데 그래서 황동규 선생 같은 아름다운 노년이 더욱 빛난다. 

 

널려 있는 게 시인이라지만 참 시인은 아무나 되지 않는다. 원로라고 무조건 대우 해주고 싶지 않은 매가리없는 시를 쓰는 시인도 많다. 나는 언젠가부터 연륜이란 것을 믿지 않는다.

 

늦가을 내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 시집으로 행복했다. 책을 덮고 나니 나뭇잎이 모두 지고 없다. 시집에서 고른 시 한 편에서 시인의 맑은 영혼이 보인다. 이런 시인 드물다.


나의 마지막 가을 - 황동규

이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조그만 산골 절터,
내가 마지막 가을을 보낼 곳은 여기다.

성긴 풀밭에 검은 주춧돌들 아무렇지 않게 뒹굴고
각자 자기 곡선 그리며 내린 낙엽들이
잔바람에 이 구석에 몰렸다
저 구석에 몰렸다 하는 빈터.
산새 하나 부리가 시린 듯
짧게 짧게 울다 말다 한다.
적막(寂寞) 같은 건 없다.
늦가을 저녁, 남은 햇빛 속에
우박이 와르르 풀밭에 튕기며 환하게 내리고
이 빠진 가사로 옛 노래 흥얼대다 우박 맞고 얼얼해져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 곳.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이제 어디로 가는지,
굳이 물으시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