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좁은 골목에서 편견을 학습했다 - 배정숙 시집

마루안 2020. 11. 26. 19:42

 

 

 

코로나 때문에 서점 가는 것도 망설여진다. 1.5단계니, 2단계니 하지만 나는 스스로 3단계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밀집 장소에 가능한 가지 않는 것, 커피집 안 가고 술집 안 간 지가 까마득하다. 처음엔 다소 답답하고 무력감이 생기기도 했지만 워낙 적응을 잘 하는 편이라 이제는 단련이 되었다.

 

더한 악조건에서도 잡초처럼 살았는데 이 정도쯤이야 하며 이겨낸다. 뭐든 맘 먹기 나름 아니겠는가. 사는 집이 조금 넓었으면 했다가도 예전에 한 방에서 다섯 명이 다닥다닥 누워 자던 생각을 하면 지금은 대궐이라 여기며 위안을 삼는다.

 

언제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비싼 음식점에서 밥을 먹을 정도로 경제력이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읽고 싶은 책은 사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책 읽는 행복도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욕심을 줄여야 책 살 돈이 나오고 읽을 시간도 생긴다.

 

요 근래 좋은 시집을 여럿 만났다. 그 중에 배정숙의 <좁을 골목에서 편견을 학습했다>가 인상적이다. 시인도 무명이고 출판사도 무명이다. 이런 책은 서점에 가도 구석진 자리에 숨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눈에 띄는 곳에 진열된 메이저 출판 시집보다 이런 시집에 눈길이 간다.

 

2등을 버리지 못하는 천성 때문이다. 네이버보다 다음이고 참이슬보다 처음처럼이고 농심보다 오뚜기다. 설사 영영 주류에 끼지 못하더라도 앞으로도 이 천성은 버리지 못할 것이다. 배정숙 시인은 이것이 두 번째 시집이지만 처음 접한다. 

 

서사성을 품고 있는 제목이 다소 계몽적이라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첫시에서 분홍주의보를 예고하면서 제대로 낙인을 찍는다. 시 잘 쓰는 사람이구나 이런 느낌이 온다. 서정성이 잔잔히 흐르는 전형적인 모범시들이다.

 

모범 답안 작성하듯 당선이나 상을 받기 위함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온 싯구들이다. 시집에서 시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읽어 낼 수 있었다. 제목을 볼 때부터 단박에 年式을 예감했는데 시를 읽으면서 시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봉숭아 핀 장독대에서 옹기 뚜껑을 닦던 누이의 아련한 뒷모습 떠올리듯 첫 시집을 찾아 읽으며 시인을 탐색했다. 만학으로 대학을 나온 시인은 환갑이 다 된 나이에 등단을 했고 70을 바라보며 두 번째 시집을 낸 것이다.

 

세상에 나온 시집들 전부 못 읽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뒤늦게 이런 시집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염병 때문에 사람들 마음이 황폐해졌다. 이런 때일수록 시를 읽으며 마음을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 늦게 핀 이 시인의 건필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