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붉음이 제 몸을 휜다 - 김유석 시집

마루안 2020. 12. 8. 19:39

 

 

 

오늘도 좋은 시를 건지기 위해 그물망을 촘촘하게 친다. 아까운 시 빠져 나가면 다시 만날 길 요원하다. 세상의 모든 시를 읽을 수는 없지만 시 읽는 일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 읽기도 누가 시켜서 숙제처럼 읽는다면 금방 싫증이 난다.

 

자발적 시 읽기는 좋아야만 오래 지속할 수 있다. 특별한 재주도 없고 저렴하기 짝이 없는 내 인생에서 시 읽기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했을까. 일찍 부모 품을 떠나야 했지만 피와 살을 준 어머니와 문자를 깨우쳐 준 초등학교 선생님이 고마울 따름이다. 

 

도서출판 상상인, 시집을 내기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출판사다. 요즘 메이저 출판사 빼고도 좋은 시집을 내는 출판사가 몇 있는데 상상인 시집은 처음이다. 어쨌든 출판 불황기에 시집이 많이 나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몇 권의 상상인 시집 중에 맨 먼저 이 시집과 인연을 맺는다. <붉음이 제 몸을 휜다>라는 다소 초현실적인 제목을 달고 나왔다. 김유석 시인은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어 낯설지 않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시집 비평할 능력은 안 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시집이 가장 완성도가 높다. 그의 시 특징이기도 하지만 유독 이번 시집에서 곰삭은 판소리 목청이 느껴진다. 생채기 많은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묘한 슬픔이 담겼다.

 

북장단에 올라 타 밀고 당기는 명창의 소리처럼 잘 정제된 싯구들이 긴 울림을 준다. 끊길 듯 이어지는 징소리의 여운도 느낀다. 너무 울어 목이 쉬었지만 귀가 불편하지는 않다. 소리꾼은 목이 쉬었다 트이기를 반복하며 득음을 한다지 않던가.

 

장식은 줄어들고 여백은 늘었지만 행간에서 감지된 여운이 참 길다. 시를 읽고 나서도 그 여운 때문에 입맛을 다시게 한다. 눈에 침이 고이게 하는 시다. 공감이 깊으면 탄복이 된다. 

 

 

행자 - 김유석

 


낙타가 사막을 건너는 것은 그 걸음에 있다.

광막할수록 느릿느릿 걷는 법,

모랫바람에 쓸려도 서둘지 않고 자그시 눈을 내린 채 타박거린다.

자신을 지치게 만드는 건 자신의 울음뿐, 울음도 짐이어서

꾸리는 행장 속에 걸으면서 버려야 할 것은 없다.

출렁이는 한 통의 물동이를 진 듯한 걸음걸이로

먼 길을 땋는다.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 건

사막 건너 또 다른 사막이 놓여 있기 때문,


이 시집 맨 마지막에 실린 시다. 나는 첫 시보다 마지막 시에 더 방점을 둔다. 시인은 의도적이었을까.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찍혔다. 이런 시를 읽고 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내 가슴에도 침이 고인다. 좋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