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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에서 울다 - 박인식

구석에서 울다 - 박인식 방랑보다 황홀한 인생은 없어 내 인생 지금껏 길 위에서 황홀했네 집 구석구석에는 방랑길의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머무르지 못하는 내 생애 앞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는 줄 모르고 이제야 간신히 어디로도 떠나고 싶지 않을 무렵 볕들 날 없던 그 구석에는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시간이 아니라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내 시간이 나이 저문 줄 모르고 허리 꺾어 울고 있네 *시집/ 언어물리학개론/ 여름언덕 어느 활자중독자의 무인도 표류기 - 박인식 #1 어느날 빈 라면 포장지 하나 파도가 실어다 주었다 읽을 거리가 포장지 라면 조리법밖에 없어 허기를 숨 쉴 때마다 읽어야 했다 조리할 때 파와 달걀을 곁들이면 더욱 맛이 좋아집니다 #2 처음 읽는 이름의 라면이었다 뽀뽀라면 조..

한줄 詩 2021.05.05

북한산, 진관사-향로봉-사모바위-백운대-보리사

이번 산행은 진관사에서 출발했다. 이른 아침 호젓하기 짝이 없는 진관사 이곳저곳을 잠시 돌아봤다. 아무도 없는 진관사를 혼자 전세낸 날이다. 슬슬 산행을 시작한다. 불과 한 달 전까지 진달래 피었던 길인데 어느덧 연두색 잎들이 달렸다. 만나자 이별부터 생각하는 것인가. 이 싱그러운 연두빛 잎들도 5개월 후쯤이면 단풍물이 들 것이다. 얼마 동안 여기 서 있었을까. 북한산의 소나무는 참 소중하다.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의 생명력에 감탄을 한다. 향로봉이다. 이곳은 오후보다 오전 풍경이 훨씬 아름답다. 저 멀리 족두리봉이 보인다. 비봉을 지나 사모바위에 도착한다. 코로나로 작년부터 바위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 망할 놈의 코로나,, 승가봉에서 걸은 길을 돌아보면 멀리 사모바위와 비봉이 보인다. 문수봉은 ..

일곱 步 2021.05.05

사람론 - 김형로

사람론 - 김형로 말씀하셨지 꽃 꺾지 마라 겨울눈 맵찬 바람 삼킨 것이라고 보는 것조차 눈치껏 하라 하셨지 시샘한다고 꽃뿐인가 술도 사랑도 제 몫 다 하면 가야 된다고 눈물로 참으라 하셨지 정해져 있다 해도 꺼내 쓰는 건 사람마음이라고 무엇보다 사람을 아껴 쓰라 하셨지 꽃만큼 귀하다고 뼈 없는 혀로도 꺾인다고 정도 헤프면 독이 된다고 *시집/ 백 년쯤 홀로 눈에 묻혀도 좋고/ 상상인 손님 - 김형로 제 고집대로 살 때는 서운하기도 하고 때론 미워도 곤히 자는 모습 보면 핑- 스치는 생각 그래도 손님 아니냐 아비라고, 그늘이라고, 품이라고 가난한 숲을 찾아온 새 아니냐 다가와 쉬는 게 얼마나 고맙냐 니 아니고 누가 찾아왔더냐 문을 살며시 닫는다 산다는 게 다 내게로 흘러드는 강이더라 길이더라 제게로 이어지..

한줄 詩 2021.05.03

나는 누구인가 - 박영희

나는 누구인가 - 박영희 유년의 토방에서, 혼자 소꿉놀이하다 사금파리 조각에 베이던 순간 방글거리는 햇살과 유일한 장난감에 느꼈던 배신감 아직도 여린 쓰라림이다 사춘기 시절, 맞받아쳐줄 반사 벽이 없어 변변히 반항도 못 해보고 웃자라버린 영악성이 스스로 가여운 내밀한 쓸쓸함이다 빛 눈부신 청춘, 이었노라고 우쭐거릴 수 없는 올라가기 힘든 나무에 사다리도 걸쳐보지 못한 앙금 이따금 신물이 되어 오르내리는 울렁임이다 유치한 채로 사람살이의 진실이 담긴 유행가 가사처럼,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챙겨줄 "살뜰한 당신" 하나 숨겨놓지 못한 숙맥이다 남들보다 잘 달리지 못하고, 이쯤에서 문득 뒤돌아보니 이쪽저쪽 감당해야 할 책임만 잔뜩 걸머진 채 오도 가도 못 하는 노을빛 아득함이다 때때로 일탈을 꿈꾸며 ..

한줄 詩 2021.05.03

남자의 클래식 - 안우성

음악 든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두 가지를 한꺼번에 못하는 성격이라 음악을 틀어 놓고 책을 읽는다든지 그런 걸 못한다. 그럴 경우 둘 다에 집중을 못하기에 되레 안 듣느니보다 못하다. 그래도 운전중에 늘 클래식 음악을 트는 친구의 취미는 본 받을 만하다. 이 책 은 매마른 정서에 단비 같은 책이다. 팔방미인 안우성은 독일에서 공부한 성악가다. 테너로 여러 무대에 섰고 지휘자로 활동했고 대중들을 위한 클래식 강연도 한다. 글도 잘 쓴다. 그래서 클래식에 관한 책인데도 술술 읽힌다. 단숨에 읽었다. 예전에 비운의 화가 반 고흐의 전기를 읽을 때의 감동과 비슷하다. 자신의 일상과 클래식 곡을 설명하면서 작곡가의 인생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유행가 한 소절에도 인생이 들어 있다는데 위대한 작곡가의 선율에는 얼마나..

네줄 冊 2021.05.03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 이기영 시집

좋은 시집을 만나면 가슴이 설렌다. 이 시집이 그랬다. 마음 가는 구절에서는 마음이 떨릴 때도 있다. 시인은 어떻게 이런 기막힌 표현을 생각해 냈을까. 나같은 얼치기 독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천연기념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집은 일반적인 시집보다 얇은 편이다. 그럼에도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읽어도 시맛이 계속 우러나온다. 설렁탕도 세 번 우러내면 구멍 숭숭 뚫린 뼈만 남는데 이 시집은 겉장이 떨어져 나가도 시맛은 끄떡 없을 것이다. 아직 시집 겉장은 멀쩡하다. 제목 긴 것이 요즘 시집의 추세인가. 는 우연히 만났다. 걷는사람에서 나온 시집은 믿음이 생겨 일단 손길부터 간다. 이 시집도 그 과정에서 만났다. 최근 시집 출판사 중 걷는사람이 가장 뜨겁다. 2할 타자도 충분히 대접을 받을 만한데 ..

네줄 冊 2021.05.02

꽃 같은 그 사람 - 박용재

꽃 같은 그 사람 - 박용재 부서질까 봐 만질 수도 없고 멀어질까 봐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네 그리워할 수 있어 행복한 흰보랏빛 그 사람 조금 떨어져서 봐야 더 아름다운 제비꽃 같은 그 사람 *시집/ 꽃잎 강릉/ 곰곰나루 심향(心香) - 박용재 봄기운에 꽃 핀다고 쉬이 기뻐 말고 부는 가을바람에 꽃 진다고 가벼이 슬퍼 마라 꽃의 피고짐은 영원하나 꽃을 바라보는 시간은 너무나 짧기만 하다 사랑하는 사람아 세상 어느 꽃향기인들 그대 가슴에서 피어나는 마음향기만 하겠는가 # 박용재 시인은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1984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 , , , , , 등이 있다.

한줄 詩 2021.05.02

가족 - 석미화

가족 - 석미화 검은 산 아래 귀신집 살림살이라고 누가 써놓고 갔다 봄날, 귀신같은 사람들하고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졌다 내일 언제 떠난다고 했지 뜨거운 냄비를 상 위에 올려두면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혔다 술병이 쌓인 만큼 돌아갈 길은 더 멀어졌다 바깥만 바라보는 일에 반쯤 혼이 나간 여자는 가족은 그러면 안 되지, 중얼거렸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참, 그렇지 비 오는 날에는 맑게 앉아서 앞으로의 거처들을 말했다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점차 거세지는 빗소리가 들렸다 해야 할 말보다 하고 싶은 말만 쌓여갔다 검은 산에 불타는 얼굴이 겹쳐 보이고 천장에서 거미가 내려오고 밤에 보는 거미는 불길하다며 서로를 몰아세웠다 그래도 여기 살 만하지 비가 그치면 이만한 데가 없지 분명 누가 돌아보았는데 다..

한줄 詩 2021.05.02

모르는 사이에 - 김점용

모르는 사이에 - 김점용 나는 왼쪽 엉덩이가 없어요 그래서 걸을 때 몹시 절어요 절룩절룩 다리가 바람인형 팔처럼 멋대로 움직이죠 그가 언제 떠났는지 정확히 몰라요 긴 수술 후에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사라지고 없었어요 왼쪽 엉덩이를 무척 사랑한 애인이 가져갔는지 몰라요 애인도 엉덩이도 연락이 되지 않아요 언제쯤 돌아올까요 늦더라도 오긴 할지 어쩌면 영영 안 올 수도 있겠죠 의사 선생님은 끝까지 희망을 가지라지만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벌써 삼 년이 다 돼 가는 걸요 모르는 사이에 꽃이 피고 아이들이 자라듯 오늘은 저도 모르는 새 비가 왔네요 비가 오고 또 무엇이 올지 몰라 바깥에 놓인 의자를 조금 기울였어요 의자 왼쪽에 고인 물이 가만히 흘러내렸어요 *시집/ 나 혼자 남아 먼 ..

한줄 詩 2021.05.02

시간은 마디를 가졌다 - 오두섭

시간은 마디를 가졌다 - 오두섭 뚝뚝 잘려지는 마디가 몸 어디에 붙어 있는 게 분명하다. 시간은, 날개를 달았을 뿐인데 그 날개인 듯 창문을 뚫은 햇빛을 타고 들어와 내 앞에 툭 떨어진 벌레 한 마리 파르르, 불시착의 날개를 접고는 꿈쩍 않는다. 등딱지가 꽤 무거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여러 개의 팔다리와 무척이나 민감한 촉수, 숨 가쁜 핏줄들 하지만 후진하는 날개는 없는 낌새다. 불현듯 내려다보니, 햇빛의 울타리가 아까보다는 조금 좁혀진 듯하다. 내 쪽에서는, 분명 차 한 잔 데워질 무렵 저 벌레는 아직껏 햇빛 위에 그대로다. 내가 못 본 사이 몇 걸음 걸어갔던 것, 햇빛을 따라갔거나, 아니면 피해갔거나, 자기 생의 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을 시간 내가 졸음에서 다시 책갈피를 여는 오후 2시쯤 *시집..

한줄 詩 2021.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