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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 떨어진 곳 - 곽재구

별똥 떨어진 곳 - 곽재구 스무살 적에 그는 학생운동을 했지 화염병을 들고 페퍼포그 장갑차 앞에 서서 옷소매를 펄럭였지 서른살에 그는 광고회사의 팀장이 되었지 연인들이 어떤 맥주를 마셔야 하는지 다정하게 알려줬고 어떤 치킨을 밤참으로 먹어야 입사 시험에 합격하는지 속삭였지 새로 지은 브랜드 아파트 분양 광고를 하다가 마흔이 되어 여당 대통령 출마자의 선거 참모가 되었지 당신이 좋아요 당신은 우리의 꿈이라는 카피를 썼지 오십이 되어 총선 공천을 얻어 국회의원이 되었지 사년 동안 악머구리 이리떼의 소굴을 전전하다 제 발로 나왔지 여의도를 떠난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 스무살이 되기 전 지용의 시를 좋아했고 언젠가 별똥 꽃 떨어진 곳 찾아간다 했지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 창비 좋은 일 - 곽재구 ..

한줄 詩 2021.05.16

꽃 진 자리에서 꽃을 기다리다 - 피재현

꽃 진 자리에서 꽃을 기다리다 - 피재현 꽃 진 자리에서 꽃을 기다리는 시간 슬픔이 아주 천천히 말라가는 시간 울컥! 할 수도 있겠으나 그냥 또 떨어진 꽃잎 세다보면 기어이는 잊을 수도 있을 허기가 슬픔을 이기는, 기차의 행선지가 궁금해지는 그런 순간은 언제나 슬픔이 끝난 시간에 조금은 아린 혀끝으로 오려니 꽃 진 자리에 돋아나는 초록의 할거에도 질기게 슬픔을 이긴 시간이 묻어 있으려니 *시집, 우는 시간, 애지출판 장지(葬地)에서 - 피재현 기다리는 내내 살아온 날들이 허망하여 나는 내 생애를 입체적으로 보기로 했다 그렇다 그것은 기다림은 어떤 예정된 것이었다 바람 속에 묻어 온 홀씨는 제 무게를 못 이겨 휩쓸리다 날리다 겨우 산비탈 돌 조각에 끼여 봄을 기다린다 나의 생애, 혹은 그 긴 바람의 여행이..

한줄 詩 2021.05.16

하룻밤 풋사랑 - 주현미

주현미 - 하룻밤 풋사랑 하룻밤 풋사랑에 이 밤을 새우고 사랑에 못이 박혀 흐르는 눈물 손수건 적시며 미련만 남기고 말없이 헤어지던 아 아 하룻밤 풋사랑 하룻밤 풋사랑에 행복을 그리며 가슴을 움켜 안고 애타는 심정 이 밤도 못 잊어 거리를 헤매며 눈물을 벗을 삼던 아 아 하룻밤 풋사랑 #하룻밤 풋사랑 원곡을 부른 손인호 선생의 고운 음성이다. 거의 기교를 부리지 않아 장식이 별로 없이 불렀어도 애절한 반주와 함께 심금을 울린다. 유행가는 말 그대로 시대를 반영한다. 노래도 가사도 부르는 방식도 유행가의 정석이다.

두줄 音 2021.05.15

연기의 지점 - 김유미

연기의 지점 - 김유미 서쪽이 몰려와 저녁을 지피고 있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을 때, 두 눈에서 켜지던 세계 팔을 휘저으면 고인 흐느낌들이 발목도 없이 걸어 나왔다 누가 사는 몸이었나? 겨울이 두 살을 밀어 올렸고 손가락 사이에서 나무가 자라나 바람을 흔들다 떨어뜨리곤 했다 한 발짝 두 발짝 유목의 길에서 만난 생의 난간 그 위에서 나를 부축하던 질서들 살들이 외로워서 흘릴 게 많아졌다 왼쪽 눈을 감으면 오른쪽 눈이 아팠다 찌익 늘어나는 솜사탕도 있고 쑥쑥 깊어지는 울음도 있다 부력의 날들이 공중으로 부양되었다 어디까지 갔니? 여기까지 왔다 발자국이 번지는 소리가 되어 해 질 녘까지 치솟는 그네 *시집/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처럼/ 파란출판 음복 - 김유미 당신은 짧은 인사말의 문..

한줄 詩 2021.05.15

두 번째와 첫 번째 사이 - 정경훈

두 번째와 첫 번째 사이 - 정경훈 두 다리 멀쩡한 것이 성에 차지 않았으니 모쪼록 발품을 팔아 새가 되었습니다 당신에게로 도달할 수 있는 지형이 평안해졌다는 것입니다 줄자를 길게 늘어뜨려 수평을 만들고 칠석의 달이 차오르면 견우와 직녀가 남기고 간 오작교가 떠오릅니다 깃털의 결을 다듬고 부리를 닦으며 매무새를 정돈해봅니다 당신을 견주니 당신도 모르게 보이는 당신의 자태 파동으로 인해 부서지는 나의 심장 그 안의 호수 이성의 박멸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밤하늘에서 가장 빛날 수 있는 행위를 고릅니다 나의 첫 번째 여행 두 개의 다리로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숨이 벅차면 자신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두 개뿐인 다리로 당신에게 가려는지요 오, 나의 superego..

한줄 詩 2021.05.15

여행 흐림 - 이규리

여행 흐림 - 이규리 여행은 골목을 바꾸는 일인데, 먼 골목 끝까지 가보았을 때 언젠가 내가 살았던 집인 것처럼 문을 밀자 뭉게뭉게 희부연 구름 덩이가 쏟아져나왔다 손을 휘저어보았지만 손은 잡히지 않았다 이 흐릿한 덩어리들은 다른 곳으로 던진 상한 마음인 것만 같고 덮은 증거도 같고 여행은 슬픔을 바꾸는 일인데, 나는 내 안의 말을 바꾸지 못하여 태도가 태도를 나무라고 있으니 그 골목 허전한 어디쯤 생의 청명이 있기나 하는지 펴보는 빈 손바닥은 머뭇거림과 갈등과 고립과 나는, 안 되는구나 길었구나 저 끝 돌아오라 누가 손짓을 해도 발바닥이 들러붙어 옴짝할 수 없는 구름 골목에서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이곳과 저곳 사이 - 이규리 ​ 다섯 평을 견디는 낮과 밤들아 너무 애쓰지 마 우리는 잊혀..

한줄 詩 2021.05.15

대척점의 당신, 나무 - 최준

대척점의 당신, 나무 - 최준 나는 나를 번역하지 않았어 지금까지 나는 당신의 중얼거림 밖에서 살아왔으니 의자로, 기둥으로, 불을 품은 육체로 다음 세대에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이념으로 무장한 적 있으니 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아직도 태양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네 가슴에 드리운 두꺼운 그늘을 뛰어넘으면 밝음이 오리라 기대하며 살지 다만 나는 나였을 뿐 당신이 아니었으니 당신이 아니었던 게 나의 잘못이라면 별은 무엇이고 달은 무엇인가 당신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순간 아는가 당신은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내 속의 얼굴이 당신의 나이테로 불리는 주름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낮과 밤을 나누어 살아가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오늘도 내가 아니네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디아스..

한줄 詩 2021.05.12

멀리 있는 빛 - 이산하

멀리 있는 빛 - 이산하 ​ 친구가 감옥에 박경리의 대하소설 한 질을 보냈다. 책을 전부 바닥에 펼쳐놓자 작은 독방이 토지로 변했다. 난 그 광활한 토지에 씨앗 대신 나를 뿌리며 장례식을 치렀다. 대학시절 시인지망생이었던 그에게 난 박상륭의 소설 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연쇄살인 뒤 나무 위에서 자진하는 주인공의 최후를 보며 그 도저한 비장미에 우리는 실성한 것처럼 얼마나 압도되었던가. '한라산 필화사건' 수배 때도 인터뷰로 여러 번 은밀히 만났다. 내가 석방되자 '시운동' 동인들의 '이륭 석방환영회'에서 그가 축가로 김영동의 노래 을 불렀다. 어둠은 가까이 있고 빛은 멀리 있는 처연한 노래였다. 깊은 강 같은 노래의 행간이 진짜 노래였다. 29살 그의 눈빛은 심야극장에서 어둠보다 더 어두워졌다. 무엇을..

한줄 詩 2021.05.12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백애송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백애송 출생지가 불분명한 일렬로 늘어선 근조 화환 제 무게에 눌려 고개를 들지 못한다 환한 불빛 아래 잿빛 그림자들 돌아가는 술잔은 채워지지 않고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로의 말에 서툴기 때문에 가만히 한쪽 날개를 토닥일 뿐 날아갈 수 없는 무게만 가슴 한편 차곡차곡 쌓인다 생활이 지나간 자리에 어려풋이 남은 자국은 희미했다 당신이 없어도 고구마 줄기는 서로 엮여 자라고 푸성귀는 무성해질 것이다 다른 한쪽 날개가 파드득거렸다 *시집/ 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걷는사람 미니멀리즘 - 백애송 목록을 작성한다 버려야 할 것들은 어제의 마음가짐과 오늘의 마음가짐이 다르다 한 잎이었다가 두 잎이 된다 다시 오는 봄엔 손잡고 모래 위를 걷자고 했던 일 서류봉투의..

한줄 詩 2021.05.12

수돗가에 뜬 달 - 이서린

수돗가에 뜬 달 - 이서린 마을 해치 장구 장단 젓가락 장단에 부부는 일찌감치 해당화 낯빛으로 감 냄새 풍기며 대문을 열었다 눈 흘기는 어린 딸의 볼 비비는 젊은 아비의 턱수염, 딸의 뺨에도 채송화가 피고 이미 물 건너간 저녁밥에 잔뜩 부은 볼 세상모를 조그만 계집아이의 심사(心思) 지아비에겐 여전히 어여쁜 젊은 지어미가 비틀비틀 수돗가에 쪼그려 앉는다 앉으면서 몸빼를 쑤욱 내리곤 쏴아아 한바탕 소낙비를 내린다 씨이, 대문 옆에 변소 있잖아 삐죽거리는 딸의 손을 꼬옥 잡는 아비 허허, 수둣가에 달이 떴네 오늘이 보름인가 내일이 보름인가 저 희고 고운 달 좀 봐라 그 해도 그 달도 지고 없는데 비 오는 달밤은 언제 또 보나 *시집/ 그때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출판그룹파란 그 남자 - 이서린 경상..

한줄 詩 2021.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