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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우울증이 매달려 있다 - 심명수

허공에 우울증이 매달려 있다 - 심명수 관념의 다이아몬드 못을 박아 거미가 집을 지었다 먹줄 튕기며, 팽팽한 얼개 때론 탄력 있게 얽어놓고 사람들은 함부로 그 생의 회로도를 빗자루로 쓸어낸다 청소용역인처럼 중요한 증거를 함부로 삭제해 버린다 가끔 누락된 것들 사다리 타고 내려와 쓸려나간 원인을 묻고 가기도 한다 누군가 이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누락되었다 맑은 허공에 파문이 인다 파문은 거미집처럼 의혹을 남기고 허공을 아파한다 허공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고질병 같은 안개 밀려왔다 밀려간다 말랑말랑한 잠을 흔들어 깨워놓고 천연덕스럽게 웃는 얼굴 핼쑥한 그림자도 끌고 와 발밑에 함부로 버린 나의 원고들과 생의 질긴 목을 조인다 누가 방아쇠를 당겼을까 반짝이는 물결, 깨진 거울이 생각을 어지럽힌다..

한줄 詩 2021.04.27

벽 장미 - 김선향

벽 장미 - 김선향 수원역 옆구리 고등동 청소년출입금지구역 초입 벽에 그려진 장미 한 송이 빳빳한 오만 원권 지폐를 쥐고 서성거리던 사내가 그리기 시작했을까 돈 대신 장미를 찾아 이 골목을 벗어나고픈 광대뼈 불거진 그녀가 그리다 말았을까 손님이 뜸한 장마철 잎사귀도 가시도 없는 벽 장미는 헤실헤실 웃고 있네 주르륵 피눈물을 흘리네 애초에 글러먹은 칠삭둥이처럼 일찌감치 끝장난 폐인처럼 피다 만 장미 그렇다고 지지도 못하는 붉은, 집 잃은 검은 개 황홀한 향기를 맡으려는지 연신 담벼락을 킁킁거리네 *시집/ F등급 영화/ 삶창 여신 쿠마리 - 김선향 네팔에는 아직도 살아 있는 여신이 있다지 쿠, 마, 리, 혈통과 가계가 온전한 집안의 어린아이는 수십 가지 조건을 통과해야 한다네 마지막으로 성스러움이 있느냐를 ..

한줄 詩 2021.04.27

밤의 대릉원 - 이운진

밤의 대릉원 - 이운진 이 밤 누가 나를 돌려세워 미혹(迷惑)을 고백하게 하나 나는 지친 걸음으로, 그보다 더 지친 영혼으로 어둠 속을 들여다본다 둥근 달빛 둥근 무덤 사이 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삶에서 건너오는 듯 수 세기의 바람이 지나가는데 짧은 생애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나였던가 아무도 기억 못 할 글을 쓰는 수인(囚人)이었고 사랑이 던져버린 돌멩이였으며 슬픔의 징후였으니 이곳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추방자였던가 이제 젊음도 없이 젊은 나를 데리고 나 자신의 허구로 사는 날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한다 빠져나갈 수 없는 아프고 허망한 이 삶도 선물이라는 말로 불러도 되는 건지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신을 향해 대답 없는 질문을 하며 둥근 달빛 속 둥근 무덤에 가만히 누워본다 한때 눈물이었고 영광이었던 모..

한줄 詩 2021.04.26

기억에는 라일락이 핀다 - 정선희

기억에는 라일락이 핀다 - 정선희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꽃잎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내게 그가 건넨 말이다 캠퍼스를 지날 때마다 라일락 향기가 났다 이상하지, 그가 지나는 어디든 그랬다 바람은 꽃잎을 건드려 향기를 맡는 이라 했다 그의 손동작이 나비처럼 우아해서 내 가슴 위에 내려앉는 나비를 꿈꿨다 속눈썹이 촉촉한 꽃잎 같아 남자 눈이 왜 이리 예뻐요? 차라리 울다가 방금 세수하고 나왔어요,라고 말했더라면 모시나비 날개처럼 섬세한 날개를 꺼내 안아줬을 텐데 손을 잡으면 깜짝 놀라곤 해서 나는 자꾸 장난을 쳤다 뭔가 바뀐 것 같지 않아요? 돌을 치우면 숨을 곳을 찾는 가재처럼 그가 스며든 구석구석 들추며 깔깔거렸다 사귈래요? 여자가 무서워요 사랑 때문에 누나는 수녀원 잠긴 창문이 됐죠 별을 믿지는 않..

한줄 詩 2021.04.26

잡지의 사생활 - 박찬용

잡지를 여럿 정기 구독하던 시절이 있었다. 문예지 한 권, 영화, 여행, 예술지까지 서너 권은 기본이었다. 한창 호기심 많고 싸돌아 다닐 때라 가볍게 세상 흐름을 읽는 데는 잡지가 가장 좋았다. 사는 것이 시들해졌기 때문일까. 지금은 문예지 하나 남았다. 그것도 정기 구독이 아니라 서점 나들이에서 구입한다. 서점에 갈 때마다 구경 삼아 들춰보는 잡지는 여러 종 있다. 요즘 잡지는 비닐에 싸여 있어서 사지 않고는 볼 수 없는 잡지도 꽤 된다. 하긴 잡지사 입장에서는 대충 읽고 맛만 본 후 안 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영업 전략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요즘 잡지도 생존 전략이 치열하다. 예전에 좋아 했던 알찬 잡지들도 경쟁에서 밀리고 적자를 견디지 못했는지 사라진 잡지들이 많다. 하긴 나부터 요즘 잡지를..

네줄 冊 2021.04.23

감자꽃 필 무렵 - 허림

감자꽃 필 무렵 - 허림 언제든 떠날 애인이었다 집은 자주 비었고 방에선 오래된 냄새가 났다 개들이 짖는 게 낯설지 않았고 괭이들이 뒤돌아보며 뒤란에 몸을 숨겼다 내 모르는 소문이 떠돌았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감자꽃이 피고 그믐밤도 길은 환했다 애인이 떠난 저녁이었다 *시집/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출판사 삭망 - 허림 갈 길이 쇠털같이 많다고 했지만 꽃들은 지금 한창 장터에서 만난 몇몇은 다음에 밥이나 먹자고 했지만 그는 내 손을 잡아끌고 아리랑순댓국집으로 들어갔다 순대에 딸려 나온 허파와 혓바닥 염통 오소리감투 오늘이 지나간 날들이 달력에서 희미해지고 오는 금요일이 며칠이니 무슨 요일이니 물었을 뿐 아무도 지나간 시간이 언제 오냐고 묻지 않았다 설사 꿈이 찾아왔어도 '참 시안타 무슨 일이지' ..

한줄 詩 2021.04.23

살아 있는, 유령들 - 이기영

살아 있는, 유령들 - 이기영 -음해 몰라서 죄가 되기도 한다 한결같이, 네가 내게 보내 준 달콤한 혀에서는 말랑말랑한 웃음이 계속 터져 나오고 어쩌나, 꽝꽝 얼어붙은 표정을 포장한 너는 수시로 뒤틀리다 습관이 된 줄을 몰랐다 숨기는 건 습관성 다람쥐가 땅속에 수없이 많은 알밤을 묻어 놓고 찾지 못하는 것처럼 숨기는 것이 많을수록 도처에 가능성은 허다해진다 싹이 될지 함정이 될지 아무도 모른 채 지층 아래 마그마가 끓어 오르는 자리는 충혈된 가시들을 단련시키기 좋은 포인트 억울한 심정에는 특화된 자리 천사처럼 너는 웃었는데 웃음은 공갈빵처럼 부풀었는데 언제 터져 버릴지 모를 그 웃음 뒤에서 덮어 버리기엔 손이 너무 시리고 돌아서 버리기엔 등이 너무 허전해서 아무것도 몰라도 죄인이 된다 *시집/ 나는 어제..

한줄 詩 2021.04.23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로 늙는다 - 전인식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로 늙는다 - 전인식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로 늙는다 불어오는 바람에 천천히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두 번, 그것도 꽃이 필 때와 질 때 불과 며칠 사이 나는 일 년 치를 한꺼번에 늙는다 피와 살이 강물처럼 빠져나가고 어디론가 뒤따라간 마음 또한 돌아오지 않는 들불이 지나간 듯 허허로운 가슴 기슭에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발이 날리며 한순간 사계절이 일순할 때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미워하는 일도 하늘 날아오를 듯 날개짓하는 열망과 물속으로 가라앉는 돌 같은 체념도 다 이맘때 일어나는 일 뜨겁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불과 며칠 사이 나는 늙는다 선명한 나이테 무늬를 그리며 단박에 늙는다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로 늙는다 *시집/ 검은 해를 보았네/ 불교문예 뱀, ..

한줄 詩 2021.04.22

수면유도제 - 전영관

수면유도제 - 전영관 신의 안검이 덮이듯 밤이 오면 신문 부고란에 투고하고 싶어진다 한파를 건너오느라 발 시린 슬픔만 과장된 바람에게 신을 신겨주고 싶다 폐지 할머니의 리어카를 보험이 필요 없는 나라로 밀어주고 싶다 등 돌리는 길고양이에게 사람을 버리듯 내게서 떠나는 몸짓이냐고 묻고 싶다 자동문보다 눈치 빠르게 벽만큼 신중하게 고민한 후에 애인보다 가까운데 실속 없는 편의점에서 부모처럼 수고롭고 멀지만 다 갖춘 마트로 개종하고 싶다 책마다 그득한 밑줄들을 낙서라고 지워버렸다 이전의 호감들은 오해였다고 끄덕였다 내 문장은 비문이라 낙담하면서 절창의 제국에 난민 신청 하고 싶다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초월을 터득하고 싶다 건강할 때는 사소하다 흘려버렸던 사소한 것들의 목록을 되찾고 싶다 내 앞에서 먼저 죽는 참..

한줄 詩 2021.04.22

입구와 출구에서 생이 서로 마주쳤을 때 - 이규리

입구와 출구에서 생이 서로 마주쳤을 때 - 이규리 물이 줄줄 흐르는 은하탕 벽엔 애써 붙인 주의들이 다 떨어졌다 우리가 결국 무얼 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애써 닿지 않으려 거리를 유지하지만 서로 보이지 않으려다 보게 되는 것 돌아나가다 부딪게 되는 것 다 벗고도 우리 단순해지지 않는다 냉정과 열정 그리고 흘러넘치는 손과 발 입구와 출구에서 생이 서로 마주쳤을 때 물가엔 얼룩말과 낙타 끝없고 덧없다 퇴장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경기처럼 저마다의 사막이자 고원에서 짧은 순간에도 상대의 슬픈 이력을 엿보아야 했다면 물이 줄줄 흐르는 수평도 절벽이 되는 난간에서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하고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거즈의 방식 - 이규리 진물이 말라붙은 거즈를 보면 그들은 어느새 한몸이 되어 있다 굳이..

한줄 詩 2021.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