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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못하는 게 희망뿐이랴 - 정기복

버리지 못하는 게 희망뿐이랴 - 정기복 희망을 버리지 못해 여기 왔다 떼어버리지 못한 갈증을 소주잔에 저당잡힌 채 절망을 불러모았다 흉어의 바다를 딛고 정박한 배 하선을 서두른 선원 몇이 완월동 오촉 전구 아래서 폭풍의 품값을 탕진하도록 꺼질 듯 꺼질 듯 꺼지지 않는 남풋불이 항구의 세월을 그을렸다 부두를 헤집던 비린 바람이 습기 찬 손길로 달려드는 자정 절망을 포기하는 게 술값 치르는 것처럼 쉬운 계산이라면 또 모른다 주머니 속 구겨진 지폐를 꺼내놓듯 살아갈 길 다림질할 수 있다면.... 버리지 못하는 게 어디 희망뿐이랴 *시집/ 어떤 청혼/ 실천문학사 모란공원, 봄 - 정기복 이곳에 오면 오래 걷지 않아도 흙살이 제 혼자 풀림을 금방 압니다 겨우내 언 땅 속에 얼지 않은 들꽃 씨앗과 애벌레 알들이 도..

한줄 詩 2021.05.11

북한산, 산성입구-중흥사-백운대-숨은벽-사기막골

코로나 덕에 작년부터 부쩍 산을 타는 일이 많아졌다. 멀리 떠날 수 없으니 가까운 북한산이라도 부지런히 오르자는 쪽이다. 5월이 가기 전에 더욱 부지런을 떤다. 이번 산행은 중흥사를 거친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계곡길 대신 임도를 따라 걸으면 대서문이 나온다. 함박꽃이 핀 무량사 입구다. 보리사 입구에서 갈림길을 만난다. 오른쪽으로 가면 중흥사를 거쳐 백운대로 갈 수 있다. 중흥사는 오랜 기간 폐사지로만 남아 있었다. 최근 10년 사이 복원 되어 절 모양새를 갖춘 사찰이다. 흔히 절에서 느낀다는 고색창연함과는 거리가 멀다. 신도시에 막 들어선 교회처럼 옛 절터에 최신 사찰 건물을 세운 것이다. 증흥사에 갈 때마다 시집 한 권을 챙겨 가 이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읽는다. 절에서는 차를 마셔야 어울린다는 것..

일곱 步 2021.05.11

등피 닦던 날 - 이형권

등피 닦던 날 - 이형권 등피를 닦던 날이 있었습니다 나직이 입김을 불어 그을음을 닦아내면 허공처럼 투명해져 낯빛이 드러나고 그런 날 밤 어머니의 등불은 먼 곳에서도 금세 찾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믐날 동네 여자들은 모두 바다로 가고 물썬 개펄에는 거미처럼 움직이는 불빛들로 가득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는 바다는 분꽃 향기 나던 누이들의 가슴처럼 싱그럽고 조무래기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북두칠성이 거꾸로 선 북쪽 하늘을 향해 꿈을 쏘아 올렸습니다. 묵은 시간의 표피를 벗겨내듯이 밤하늘에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했고 범바우골 부엉이가 울고 가도록 어머니의 칠게잡이는 끝이 없었습니다 *시집/ 칠산바다/ 문학들 범태상회 - 이형권 아버지가 열무김치에 쓴 소주를 마시던 곳이다 곰살궂게 쫀득거리던 고무과자에 군침..

한줄 詩 2021.05.10

욕망과 파국 - 최성각

작가 최성각은 언젠가부터 환경운동가로 불린다. 태생적으로 문명화 사회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 것 같은 사람이다. 신춘문예로 등단해서 몇 권의 소설을 발표했지만 그의 소설을 읽은 적은 없다. 내가 읽은 그의 글은 환경 관련 책이다. 다독을 하는지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많이 남긴다. 이 책도 그가 읽은 환경책에 관한 해설이다. 김종철, 권정생, 그레타 툰베리 등 환경 문제를 지적했던 사람들의 책 위주다. 책 목록을 보니 내가 안 읽은 책이 대부분이다. 평소에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있고 환경 문제에 대한 각성을 하고 살면서도 그렇다. 누구 따라할 생각은 없고 이라는 책 하나로 그에 대한 감사와 찬사를 함께 보낸다. 무슨 연애 소설 제목처럼 보이지만 물질을 쫓는 인간의 욕망과 필연적 그 ..

네줄 冊 2021.05.10

나지막이 부드럽게 - 김태완

나지막이 부드럽게 - 김태완 무거운 몸 이라고 생각하니 더 무거운 몸 부는 바람도 버겁다 걸음은 짧아지고 생각은 깊어지고 평생을 살아도 알 수 없는 길에서 비는 길게 내리고 흘러온 바다 요동치며 뿌리를 흔든다 나 그만 갈래 엄마, 나 그만 가면 안 돼? 나지막이 부드러운 음성 마음을 다독이는 소리 먹먹한 가슴으로 보이는 저기 저 불빛 그래도 가자, 꼭 잡은 손이 따뜻하다 무거운 몸, 일으키니 나지막이 빛 고운 야생화 언제부터 있었던가. *시집/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북인 꿀, 벌 - 김태완 한 무리의 벌 떼 꽃이란 꽃은 모두 움츠린다. 벌은 꿀이 될 수 있을까 혹은 꿀로 벌이 될 수 있을까 마지막이 되어서야 고개를 숙였다. 그 뻣뻣하던 위장을 낮추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 자세는 인정한다는 뜻과 이..

한줄 詩 2021.05.10

중년의 귀가 - 허진석

중년의 귀가 - 허진석 꿈속에서는 조금 더 멀리 여행하며 조금 더 가난하다 오래전 여행 책자에 나온 호수와 가게가 사라지고 없다 돌아오는 기차가 끊겼거나 환승 택시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집에 가는 버스는 늘 붐비고 낯선 사람 가득하다 오래전에 죽은 친구가 어린 얼굴로 나타나 손을 흔든다 운전수는 아는 길로 가지 않는다 골목은 변했고 아무도 없다 망각은 통증이다, 주방에서 보글보글 기억이 끓어넘친다 집 전체가 앓는 이 저녁 식구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시집/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난다/ 파란출판 중년 2 - 허진석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그날 마지막 버스가 떠났다 물 고인 종점 내 몫의 짐을 지고 달려간 그곳 밤이 깊었고 흘러간 사나이들은 뱀을 사냥하는 곰과 오래전에 먹은 우럭회 얘기를 하며 늙어 가고 있..

한줄 詩 2021.05.10

Der Leiermann - Franz Schubert

Voice: Philippe Sly Guitar: Adam Cicchillitti # 가곡을 듣고 감미롭다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노래다. 미성이란 이런 것인가. 위 아래를 비교하면서 듣는 맛도 괜찮다. 기타 반주에 부르는 노래와 피아노 반주에 부르는 노래가 각자 개성이 있다. 귀가 맑아지면 마음도 맑아지는 법이다. Winterreise (겨울나그네) - Franz Schubert Der Leiermann (거리의 악사) Bass-Baritone 김병희 Pianist 김혜원

두줄 音 2021.05.08

노가다 칸타빌레 - 송주홍

아주 흥미롭고 유용한 책을 읽었다. 서른두 살의 기자 출신이 노가다를 하며 겪은 일을 쓴 노동일기다. 세상의 모든 일이 대졸자 엘리트 출신들 위주로 흘러간다. 당연 고졸자가 대우 받는 분야는 거의 없다. 어떤 엄마가 초등학생 아이와 공사 현장 부근을 걷다 학원 가지 않겠다고 투정부리는 아이에게 그랬단다.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나중에 저런 사람 된다." 이렇게 노가다를 하는 사람은 세상의 낙오자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아쉽게도(?) 대학을 나와 기자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어쩌다 잠시 노가다를 했다가 적성에 맞는 것을 알고 아예 노가다 판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 일부는 글을 쓸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정신과 육체가 꽤 건강함을 느낀다. 저자는 행복을 최고 가치로 ..

네줄 冊 2021.05.05

아침이라는 영정사진 - 천수호

아침이라는 영정사진 - 천수호 푸르스름한 수염으로 그가 왔다 이 땅의 청년으로 다시 오지 않을 듯이 사진 속에서만 햇빛 웃음이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는 세상에서 살아왔지만 간혹 가래침을 맞는 영상이 뜨기도 했다 멱살 잡히는 장면은 뉴스감이 되지도 못했다 암청색 바탕화면에 검은 형상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침은 그런 것이다 주검으로 정지되었던 사물들이 창을 내고 빛을 반짝이기 시작한다 이런 영상은 매일 볼 수도 있지만 이미 죽어가는 오늘 아침은 내일 그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단단한 사각 틀 안에 있다 가만히 들어보면 화면 밖에서는 목련이 핀다는 봄의 말이 말이 들리지만 발인의 국화 향기가 줄을 서는 아침이다 꽃잎은 빳빳하지만 이 흰 꽃들에게 정규직이라는 꽃말은 없다 웃음이 정지된 사진으로는 ..

한줄 詩 2021.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