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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하고 싶을 때 읽는 책 - 김흥식

서점에 갈 적마다 신간 도서 코너를 제일 먼저 들른다. 신문이든 포털 뉴스든 각종 미디어에서 신간 안내 기사를 읽은 후에 관심 가는 책을 만나면 마음이 설렌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책을 발견할 때는 보물이라도 찾은 듯이 반갑다. 반면 정체 불명의 저자에다 기존에 나왔던 것을 모방한 책을 볼 때면 입안 가득 씁쓸함이 고인다. 유튜브를 볼 때 함량 미달의 내용으로 앵벌이를 하는 양아치 유튜버들이 있듯이 출판계도 앵벌이 수준의 출판인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김흥식 선생은 30년 넘게 출판사를 운영했다. 제목이 너무 정직해서 다소 허술하게 느껴지나 내용은 아주 진지하다. 출판인뿐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주 유용하다. 나도 이 책을 읽고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게 되었다. 책의 일생을 파헤..

네줄 冊 2021.04.21

간고등어 - 손석호

간고등어 - 손석호 오른손이 의수인 그는 어선을 탔었다고 했다 노을이 도마 위 핏물을 벌겋게 덧칠하자 무쇠 칼이 고등어 배를 가르던 왼손을 놓아주었다 목장갑에 달라붙은 왕소금을 털어 낼 때 화구 밖으로 거세게 역류하는 화염 파르르 얼굴에서 출렁이는 난바다 석쇠를 뒤집는 팔뚝 근육이 로프처럼 팽팽하게 솟았다 한 번도 눈감지 않은 고등어의 눈알과 마주쳤을 때 연기 때문에 맵다며 갱빈으로 걸어 나갔다 내성천이 바다로 가는 물길을 보여 주자 꾹 깨문 입술 쪽으로 왕소금처럼 왈칵 뿌려지는 눈물 억새 무리 어둡도록 파도가 되어 주고 버들가지가 뺨을 훑어 주는 동안 강물이 이유를 묻지 않고 따라왔다 배를 가른 고등어의 안쪽 등뼈 같은 억새밭 샛길을 가로질러 돌아오며 눈가에 핀 소금꽃 털어 냈다 골바람도 나와 앉은 툇..

한줄 詩 2021.04.21

찢어진 고무신 - 이산하

찢어진 고무신 - 이산하 감옥의 독방에 살 때 내 옆방에 젊은 사형수가 들어왔다. 세상을 충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연쇄살인범이었다. 그는 한겨울에도 사각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뛰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혼자 운동장을 달렸다. 우리는 서로 얼굴은 보지 못하지만 가끔 통방을 했다. "오늘은 몇 바퀴 뛰었어요?" "어제보다 한 바퀴 덜 뛰었어요." 대답은 늘 똑같았다. 그게 몇 바퀴인지 나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아마도 '덜 뛰는' 날이 없을 때가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짐작만 했다. 멀리 구치소 담장 위로 낙엽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느날 아침이었다. 평소 수런거리던 복도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유난히 큰 교도관의 발자국 소리가 옆방에 멈췄다. "수번 5046번 접견!" "오늘 면회 올..

한줄 詩 2021.04.21

더 이상 운세를 보지 않기로 하였다 - 백애송

더 이상 운세를 보지 않기로 하였다 - 백애송 달력 틈새에 끼여 있던 날 많은 날과 날들에게는 짠맛이 났다 눈을 뜨면 운세를 검색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하루 오늘 해야 하는 것보다 오늘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더 집중하던 날 피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은 늘 어긋났고 누군가는 내 말에 정중한 매듭을 지어 버렸다 사용하지 않은 삶의 근육들은 의도와 상관없이 방관되었다 오늘은 무사히 벽에 박힌 하루를 빼낼 수 있을까 *시집/ 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걷는사람 별책부록 - 백애송 중요한 순간은 미끄러져 지나간다 황급히 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뎠다 손등에 남은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그곳은 허방이었다 무언가가 있을 것이란 기대는 서로의 시간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뜸만 들..

한줄 詩 2021.04.20

너무 상투적인 삼청동 - 홍지호

너무 상투적인 삼청동 - 홍지호 사랑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다짐들 헤어지지 않고는 적을 수 없는 예언과 미치지 않고서야 미칠 수 있었겠는가 견디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희망이라는 생각 거품처럼 거품같이 겨울처럼 겨울같이 걷다보면 걷게 된다 예언 속을 생각하다보면 생각의 끝에 도착할까 죽지 않는다고 한다면 살아갈 수 있겠는가 삼청동 길을 걷다가 문득 여기에 살고 싶다 살 수 없겠지 말했을 때 말에는 힘이 있다 살 수 있다 말해보라고 말해준 사람은 너였지 귀신들이 하는 말을 듣고 도와준다고 한 사람은 너였지 삼청동에 살고 싶다 삼청동에 살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말하며 우리는 크게 웃었다 말에는 힘이 있다 말해준 사람은 너였는데 나는 삼청동에 살고 있다 지금은 어디서든 삼청동에 살고 있다 ​ *시집/ 사람이..

한줄 詩 2021.04.20

항소이유서 - 유시민

#유시민이 26세 때 암기해 일필휘지로 썼다는 항소이유서 전문이다. 법률 용어가 친숙하지 않는 것처럼 이 글도 일상과는 거리가 있는 딱딱한 문장이다. 특히 내가 경어체 문장에 적응을 못 하는데 이 글은 술술 읽힌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대단한 재주다. 유시민은 천상 작가다. 항소이유서 - 유시민 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호소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

여덟 通 2021.04.20

어쩌다 시에 꽂혀서는 - 정연철

시는 가슴에 작은 냇물을 만든다. 내 속에 존재하는 온갖 감정들을 냇물에 실어 보내자 시가 온몸 구석구석 실핏줄처럼 뻗어 나간다. 마음에 동요가 인다. 열 일곱 살 소년이 기형도 시를 읽으며 이런 감정을 느낀다. 나는 스물 일곱에도 천방지축 노느라 잘 몰랐던 시를 소년은 자기 가슴에 온전히 담을 줄 안다. 방과 후 물기를 한껏 머금은 숲길을 걸으며 이런 시를 쓴다. 우울의 심연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비 오는 날,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나무들, 혼돈희 틈을 타 은밀하고 용의주도하게 눈물을 흘려 보낸다 저 눈물 소진하고 나면 햇살에 반짝, 자체 발광하겠지 그렇다면 나 지금 지체 없이 울어야 할 때 실제 소년은 자주 운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가 생각나서다. 엄마가 보고 싶고 미안해서다. 소년은..

네줄 冊 2021.04.19

꽃이 운다면 - 손남숙

꽃이 운다면 - 손남숙 어느 집 슬레이트 지붕 골짜기로 흘러 내려오는 붉음 같겠지 박태기는 선명한 분홍색을 핏물처럼 빼내는 중이었어 빈집 꼭대기 위로 올라가 하염없이 머나먼 길을 돌아온 어느 자식의 긴 밤을 같이 보내려던 것이었지 마침 곁에는 밤새 엿듣는 나무가 있었어 벚나무는 우연히 흘러 들어온 방랑객처럼 그 집 마당 구석에 서 있었지 뭔가 운명처럼 서로를 맞대 보는 날도 있는 거지 봄날에 먼저 쏟아지는 건 벚꽃이야 흩날리며 제 울음을 바삭하게 말려 보내면 옆에서 가만히 들어 주던 박태기가 별안간 깜짝 놀랄 분홍색을 만들어 슬그머니 금이 간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꽃들의 눈물이 배어 들어가 눈물은 천장을 타고 무너져 가는 서까래 밑으로 떨어지겠지 삐걱거리던 마루는 다 뜯겨 나가고 없어 꽃잎들이 낱낱이 듣..

한줄 詩 2021.04.19

총상화서 - 류성훈

총상화서 - 류성훈 봄은 한 번도 봄에 이른 적 없고 너무 가벼워 담장 어디에서도 주울 수 없는 발소리가 땡볕 아래의 줄기들을 깨운다 용서 같은 건 받는 쪽보다 하는 쪽이 나을 줄 알았어, 네가 아침을 그렇게 닮은 줄 몰랐던 나는 주전부리 하나 없는 저녁만 닮아 갔다 나무도 링거를 맞는 세상이네 그런 소리나 하면서 기약 없는 인사를 늘려 가면서 우리는 더 가벼운 곳으로 꽃잎들이 다시 하늘로 졸도한 온도계 눈금을 손금처럼 펴 보이는 네겐 모든 상처들만 유채색이었다 밀과 보리가 자라듯 우리는 무한히 자랄 줄 알았지 다르게 자란 건 죄야, 나는 너를 탓하고 너는 봄을 탓하며 젖은 잎을 주웠다 웃으면서, 웃으면서 끼워 놓은 책은 다시 펴지 말자 아무리 걸어도 마주치지 않을 계절 앞 봄,이라는 말은 더 근질근질했..

한줄 詩 2021.04.19

없는 것보다 못한 - 여태천

없는 것보다 못한 - 여태천 어둠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어쩌지 못하고 망설일 때 하나둘씩 카드를 접기 시작했다. 마감뉴스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재수 없다. 메시지는 저 멀리서 온다. 간절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상황은 언제나 최악이다. 한 사람은 이제 걷기 시작했지만 한 사람은 지금 막 주저앉는다. 누군가를 웃게 하는 누군가를 울게 하는 언제나 몸은 피가 모자라고 그 사실은 숨길 수 없다. 만질 수 있는 따뜻한 손이 아니었다. 너무 가까이 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민음사 슬픔은 자란다 - 여태천 잘 자라지 않았다. 당신의 목소리는 느긋하고 나이스했지만 아침 일찍 벌레를 잡는다는 새 이야기는 좋아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당신이 기억하고..

한줄 詩 2021.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