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 이기영 시집

마루안 2021. 5. 2. 19:54

 

 

 

좋은 시집을 만나면 가슴이 설렌다. 이 시집이 그랬다. 마음 가는 구절에서는 마음이 떨릴 때도 있다. 시인은 어떻게 이런 기막힌 표현을 생각해 냈을까. 나같은 얼치기 독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천연기념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집은 일반적인 시집보다 얇은 편이다. 그럼에도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읽어도 시맛이 계속 우러나온다. 설렁탕도 세 번 우러내면 구멍 숭숭 뚫린 뼈만 남는데 이 시집은 겉장이 떨어져 나가도 시맛은 끄떡 없을 것이다. 아직 시집 겉장은 멀쩡하다.

 

제목 긴 것이 요즘 시집의 추세인가.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는 우연히 만났다. 걷는사람에서 나온 시집은 믿음이 생겨 일단 손길부터 간다. 이 시집도 그 과정에서 만났다. 최근 시집 출판사 중 걷는사람이 가장 뜨겁다.

 

2할 타자도 충분히 대접을 받을 만한데 연타석 안타를 치는 5할 타자라고 할까. 시집 팔아 부자 될 일은 없을 것이나 좋은 시집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나같은 무명 독자는 열심히 시를 읽는 것이 응원이다.

 

이기영 시인은 남자 이름처럼 들리지만 여성 시인이다. 시인들이 많아 분명 동명이인도 있을 것이다. 이 시집이 두 번째 시집이다. 내가 감히 비평할 능력은 안 되지만 첫 시집보다 군더더기 없이 훨씬 정제된 느낌이다.

 

잘 숙성된 시란 이런 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바로 단맛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쌉싸름한 싯구를 음미하다 보면 점점 시맛에 중독이 된다. 잘 다듬어진 문장이 낙지 빨판처럼 흡인력이 대단하다. 쓸데 없는 감정 낭비할 일 없이 온전히 싯구에 젖어 들었다.

 

*지나가 버린 것들과 오지 않은 날들이 억장이 수만 번도 더 무너져 내린 몸을 열고 눈물을 닦았다

절망이 절정일 때였다

 

*<유월의 숲> 일부

 

이기영 시는 어두워서 더욱 여운이 남는다. 벌이 나는 꽃천지의 화사함 속에서도 고독을 제대로 즐길 사람이다. 좋은 시집을 만나면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어쩌다 시인이 되었나요? 그 대답을 대신할 시가 있어 올린다. 시집 맨 마지막에 실린 시다.

 

 

졸음이 깔리기 시작한 낯선 방 - 이기영

 

바다는 여전히 환하고
달마중이나 기다리는 정박한 배들은
늙은 어부의 발소리를 귀신같이 알고 있지만

바람 속에서 저 혼자 무너지고 있는 지붕

언젠가 구급차에 실려 간
늙은 어부마저 돌아오지 않으면

혼자 남겨진 폐가 마당에
손질하다 만 그물이
뱀 허물처럼 아무렇게나 뒹굴고

페인트칠 벗겨 나간 담장에 하릴없는 담쟁이만
때 이른 장마를 몰고 와
청춘의 푸른 피처럼 흘러갈 것이다

 

 

'네줄 冊'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가다 칸타빌레 - 송주홍  (0) 2021.05.05
남자의 클래식 - 안우성  (0) 2021.05.03
한국인의 종합병원 - 신재규  (0) 2021.04.30
울릉도 오딧세이 - 전경수  (0) 2021.04.27
잡지의 사생활 - 박찬용  (0) 2021.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