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마디를 가졌다 - 오두섭
뚝뚝 잘려지는 마디가 몸 어디에 붙어 있는 게 분명하다.
시간은, 날개를 달았을 뿐인데
그 날개인 듯
창문을 뚫은 햇빛을 타고 들어와 내 앞에 툭 떨어진 벌레 한 마리
파르르, 불시착의 날개를 접고는 꿈쩍 않는다.
등딱지가 꽤 무거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여러 개의 팔다리와 무척이나 민감한 촉수, 숨 가쁜 핏줄들
하지만 후진하는 날개는 없는 낌새다.
불현듯 내려다보니,
햇빛의 울타리가 아까보다는 조금 좁혀진 듯하다.
내 쪽에서는, 분명 차 한 잔 데워질 무렵
저 벌레는 아직껏 햇빛 위에 그대로다.
내가 못 본 사이 몇 걸음 걸어갔던 것, 햇빛을 따라갔거나,
아니면 피해갔거나,
자기 생의 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을 시간
내가 졸음에서 다시 책갈피를 여는 오후 2시쯤
*시집/ 내 머릿속에서 추출한 사소한 목록들/ 문학의전당
나무에는 길의 유전자가 있다 - 오두섭
아득한 그곳에 길은 안 보였다
활엽수 낙엽들이 원주민마냥 터를 잡고
수상한 들녘에서
저 너머 보이지 않는 숲을 향해
바람의 길을 살펴보는 나무들이 있었다
눈먼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고
발길이 가고자 하는 그곳으로
꼬불꼬불 이어지는 것이 되었으면 했다
어느 날 아침 강줄기 하나가 뿌리로 빨려들어 갔다
두려움으로 내딛는 첫 발걸음
그렇게 앞서 간 발자국을 밟아서
길 하나 놓아진다면
끝을 모르는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라면
어린 나무들이 길이 생기는 곳으로
줄지어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러고만 싶은 나무들은
목을 길게 뻬고서는
온종일 벌판을 바라보고 있는데
저 먼 한 곳에서 어떤 사람이
일몰을 등에 지고
가물가물 걸어오고 있다
# 오두섭 시인은 경북 선산 출생으로 197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소낙비 테러리스트>, <내 머릿속에서 추출한 사소한 목록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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