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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잠시 - 허문태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잠시 - 허문태 잠시라는 것도 보인다는 것도 들판의 문제다. 어디서부터 흘러왔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헤어졌는지 문득 들판의 문제다. 어느 봄날 민들레를 한없이 보고 있었던 것이, 노랑나비가 앉아 있는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냇물의 소리는 부딪치는 소리라서 나보다 맑다고 생각했다. 다 들판의 문제다 지금은 겨울 들판에서 저수지가 보였을 때 기러기는 저공비행을 한다.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서너 명씩 너덧 명씩 식탁에 둘러앉았다. 일인용 식탁은 없고 사인용 식탁에 혼자 식사하는 경우는 있다. 잠시 뭔가가 보일 때 얼른 봐두자. 꽃이 피는 곳은 어디고 나무는 어디로 걸어가는지, 나는 아직 늙어서 손에 굳은살이 두툼한 사람들과 식사를 한다. 괘종시계 초침 소리가 ..

한줄 詩 2021.05.21

북한산, 육모정-영봉-백운대-비봉-탕춘대

북한산 종주를 위해 육모정을 출발해 영봉을 거쳐 백운대를 올랐다. 여기서 출발해 족두리봉까지 오르면 북한산 종주라 할 수 있다. 가랑비가 내리는 중에 육모정을 출발했다. 이슬비 내리는 용덕사에서 녹음된 염불 소리가 들린다. 아무도 없는 절 주변을 걸으며 한참을 머물렀다. 영봉이 가까워질 때 비가 개기 시작한다. 멀리 인수봉이 보인다. 영봉에 도착한다. 비가 개면서 인수봉을 감싸고 있던 구름 안개가 서서히 물러난다. 영봉 지나면 바로 하루재가 나온다. 예전에는 여기서 잠시 쉬어가기도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줄을 쳐서 막아버렸다. 인수암에 도착할 때쯤 해가 나기 시작한다. 출발할 때 비 온다고 투덜거릴 필요 없다. 날씨는 이렇게 산행을 돕는다. 문을 닫은 백운대피소다. 예전에 자주 이용했던 곳인데 새로 정비해..

일곱 步 2021.05.20

애초 걸었던 길 - 류성훈

애초 걸었던 길 - 류성훈 봄이 너무 미끄러워서 그랬어요. 육절기가 골목을 저미는 사이, 갓 난 힘줄과 헌 힘줄 사이, 멸종 전의 계절 몇 가닥이 분별없이 솎아진다 굳어 갈수록 짙게 무르익는 피 냄새 눈 감아도 찾아갈 좁은 잎맥들이 소복한 거읏을 긁는다 너희는 집을 나서기 이전, 혹은 나설 집도 없던 아이들의 비릿한 연륜 속, 벗어나지 못할 불티 위에 열쇠를 꽂았다 애초 걷던 길을 밟고 밟는 바람에 따갑고 요란하게 물들 때 노란 스쿠터들이 뜨거운 기름 위에서 박식하게 여물어 간다 너희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길들에 대해 말했고 갈 수밖에 없었던 길들에 대해 들어야 했으니 욕설 같은 날카로움으로 번듯한 흉터를 닮은 모습으로 의자 위에서 살아남은 잔뼈들이 분별없이 걸레질했다 술기운으로, 따뜻한 피 냄새 ..

한줄 詩 2021.05.18

중년 - 김종필

중년 - 김종필 연애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망해서 울고 흥해서 웃고 한 고비 두 고비 내 부실한 이가 되고 그대 부실한 관절이 된 지금 손잡고 발맞추며 먼 황혼을 향하는 길 죽음이란 강 건널 때도 손 놓지 않고 혼자 남아 울지 않도록 *시집/ 무서운 여자/ 학이사 사랑은 없다 - 김종필 얼굴도 모르고 만난 첫날밤 옷고름 풀며 약속했지 날 사랑한다고 떠나는 일 없을 거라고 말했던 당신인데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며 서러움과 눈물로 보낸 시간 그리워한 것도 죄인 건지 세상은 내게 죄를 묻네 사랑했다 말하지 마라 내 맘에 내 눈에 눈물 나게 한 당신 사랑했다 말하지 마라 내일은 오실까 모레 오실까 애타는 밤에 기도했지 날 사랑한다고 기다리면 돌아온다고 말했던 당신인데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며 서러움과 ..

한줄 詩 2021.05.18

내 안의 당신께 - 박남준

내 안의 당신께 - 박남준 저문 강에 내린 마음으로 편지의 시작을 썼을 것이다 가슴을 뛰게 하는 연분홍을 숨기지 않겠다고도 했을까 빛나는 풍경의 가장 중심에 당신이 있었으면 그런 꿈을 꾸었지 당신의 눈동자에 사로잡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은 내 고백이었을 것이다 잠든 당신의 얼굴에 미소를 짓고 당신보다 먼저 눈을 떠 향기로운 찻물 올려놓고 싶은 욕심쯤은 부려보고 싶었던 것 내 어리석은 이마가 바닥에 닿을 수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다리가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할 수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삶의 간절함은 어디에서 오는지 비로소 눈먼 날들이 나를 여기 이끌었는지 살아 있으니 절합니다 내 안의 당신께 절합니다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걷는사람 절 - 박남준 푸른 바다..

한줄 詩 2021.05.18

푸른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 조하은

푸른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 조하은 어떤 약속이나 희망 없이도 민들레 질경이 엉겅퀴 뒤엉켜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었다 지고 감나무 밤나무 고욤나무 주거니 받거니 저녁 밥상처럼 노을빛 가득 품었다 지루한 애인처럼 버리고 싶었던 오래된 집 마당 귀퉁이 반질반질하던 솥뚜껑 위로 적막이 모여든다 웃자란 아욱 순 뚝뚝 따 잘 익은 된장 풀어 두레밥상에 올려놓으면 몸속까지 따뜻함으로 환했던 시간 파란 철 대문 빛깔 다 사위고 웃음소리 빠져나간 평상 푸른 밥상을 마주하리라는 희망으로 녹슨 대문에 풀색 칠을 입힌다 멀리 예배당 종탑 위로 넘어가던 햇살 미몽처럼 오래도록 걸려 있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민들레의 생존법 - 조하은 아침이 되면 꽃잎을 열고 저녁이 되면 꽃잎을 닫았다 꽃잎 채 열기도 전에 ..

한줄 詩 2021.05.17

폐업 신고 하던 날 - 김선향

폐업 신고 하던 날 - 김선향 수원세무서 앞 일찍 떨어진 은행잎들이 갈피를 못 잡고 폐업 사유를 묻고 무실적이라 답하고 임무는 싱겁게 끝나고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가게가 문을 닫고 개업을 하고 다시 망해 나가떨어지는가 나도 예외는 아니다 작정한 것도 아닌데 네 발길은 하노이에서 온 도티화이네 쌀국숫집에 닿았다 한중일 안마소로 간판이 바뀌었다 마침 안마를 받고 나오던 늙은 남자의 상기된 눈과 마주쳤다 쌀국숫집 대신 한중일 안마소는 문전성시를 이루는 걸까 비가 내려 공치는 날이면 진종일 고향의 음식으로 이를테면 부화 직전의 삶을 달걀을 안주 삼아 향수를 달래던 이주노동자들 그들 토란잎 같은 미소가 생생하다 그때 술 한잔 받을 것을 그 선의를 왜 마다했을까 폐업 신고를 하고 사라진 쌀국숫집 처마에 서서 발치에..

한줄 詩 2021.05.17

세한 - 김유석

세한 - 김유석 밤 깊도록 서랍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묵은 편지다발 훔쳐 펼치고 다락방 생쥐 생고구마 갉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버리고 싶은 것들을 털며 밤도둑이 들러 가고 있었다. 세상 어느 구석을 돌아와 늦은 자리를 펴는 잠 속 숨겨둔 애인의 발씨처럼 눈은 쌓이고 늙은 감나무를 밤새 어디로 데려갔다 오는지 들판까지 마당이 나가 있는 아침. 두더지처럼 눈밭을 기는 것이 있다. 잡아먹으면 약이 될 듯도 싶은 세월이라는 저 짐승.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상상인 회(廻) - 김유석 복사꽃 만장을 세우고 여든 번째 봄 사행으로 들러 가네. 마을에서 뒷산 사이, 한평생 똬리 튼 길 허물처럼 벗겨지네. 바늘땀 없는 옷을 입은 나비 흰 종이꽃에 앉아 떠가네. 감자밭 가는 노인의 귀에는 안 닿고 다음 생은..

한줄 詩 2021.05.17

칸트의 산책로 - 최준 시집

근래 보기 드물게 여러 번 읽으며 음미할 시집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최준의 다. 다섯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경희대 재학 중이던 1984년 등단했으니 37년 전이다. 그 동안의 시집이 다섯 권이면 아주 게으른 시 쓰기다. 이 시집도 네 번째 이후 11년 만에 나왔다. 비주류에 더 눈길이 가는 성격이라 시집도 덜 주목 받는 출판사 시집에 관심이 많다. 최준 시집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이 시인 소문도 없이 오랜만에 시집을 냈구나였다. 황금알에서 가끔 좋은 시집을 만나기는 했어도 최준 시집은 유독 반가움이 앞섰다. 예전에 누군가 최준의 시를 해설하면서 그를 천재 시인이라 했다. 그때 든 생각은 이 사람이 무슨 李箱이라도 된다는 걸까. 시를 잘 쓴다고는 생각했지만 천재까지는 아닌데였다. 그러나 이 시집 를..

네줄 冊 2021.05.16

칠산 노을 - 김보일

칠산 노을 - 김보일 칠산 앞바다에 늙은 살구나무가 꽃을 피우고 법성포 구수산에 철쭉이 질 때면 조기떼들이 오수처럼 몰려오는 시간 늙은 살구나무와 철쭉의 시간이 몸 풀러 친정으로 돌아오겠다던 조기들의 약속과 어김없이 한 몸이 되는 봄날 간다는 기별도 없이 누가 울다 갔는지 칠산 앞바다 일곱 개의 눈시울이 하나로 붉었다 *시집/ 살구나무 빵집/ 문학과행동 와유산수(臥遊山水) - 김보일 불갑산이라 했다 잎 진 자리 꽃 피어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를 품고 있다는 산 그 산에 있다는 불갑사 해불암의 낙조도 상사화의 입술처럼 붉다고 했다 책상물림하랴, 술상물림하랴 푸른 이파리의 호우시절 다 떼어버리고 눈 침침해지고, 몸 어둑해서야 투구봉 너머 장군봉 너머 해불암의 낙조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깃발처럼 붉..

한줄 詩 2021.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