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석에서 울다 - 박인식

마루안 2021. 5. 5. 19:32

 

 

구석에서 울다 - 박인식


방랑보다 황홀한 인생은 없어
내 인생 지금껏
길 위에서 황홀했네

집 구석구석에는
방랑길의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머무르지 못하는 내 생애 앞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는 줄 모르고

이제야 간신히
어디로도 떠나고 싶지 않을 무렵

볕들 날 없던 그 구석에는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시간이 아니라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내 시간이
나이 저문 줄 모르고 허리 꺾어
울고 있네


*시집/ 언어물리학개론/ 여름언덕

 

 

 

 

 

 

어느 활자중독자의 무인도 표류기 - 박인식


#1 어느날 빈 라면 포장지 하나 파도가 실어다 주었다 읽을 거리가 포장지 라면 조리법밖에 없어 허기를 숨 쉴 때마다 읽어야 했다

조리할 때 파와 달걀을 곁들이면 더욱 맛이 좋아집니다

#2 처음 읽는 이름의 라면이었다 뽀뽀라면
조리법을 읽으며 포장지에 없는 뽀뽀라면 광고 카피를 상상해 후렴으로 따라 읽어야 떠나온 사랑도 함께 숨 쉴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뽀뽀라면 언제라도 좋아요

#3 다른 어느날 뽀뽀라면이 상자들이로 무인도 모래사장에 올라앉기 시작했다 이날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뽀뽀라면 지옥문이라도 열겠다는 꿈을 읽어야 숨이 따라 읽혀졌다

#4 또 다른 어느날 그 꿈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읽고자 기어이 뽀뽀라면 상자 엮은 뗏목을 띄웠다 뗏목에 쏟아져 내리는 밤마다 별빛을 뽀뽀라면의 말로 번역해서 읽고 또 읽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뽀뽀라면 언제라도 좋아요

 

 



*시인의 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면
태초 이전에는 소리가 있었겠다

소리가 말이 되기까지
갓난아이가 말을 배울 때까지
모든 목숨은 존재에서 의미로 넘어가고
알게 모르게
언어물리학을 익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모든 시들이 언어물리학으로 씌어진 게 아닌가 싶어
나름 언어물리학 문법으로
시의 집
한 채 지어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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