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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별 - 전인식

어떤 이별 - 전인식 -구두와 대머리 아저씨 전철이 막 출발하려고 스르르 문이 닫힐 때 이 열차 타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듯 머리가 약간 벗어진 중년의 아저씨 이종범이 2루 도루를 감행할 때의 슬라이딩으로 아슬아슬 한쪽 발이 먼저 닿아 세이프되려는 순간 슬금슬금 움직이던 열차에 결국 사람 대신 벗겨진 구두 한 짝만 타고 말았습니다 처음 신고 나온 반짝거리는 새 구두 한 짝만이 볼일 급한 주인 대신 어디 다녀올 듯 객실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말았습니다 신발을 찾으려, 열차를 잡으려 창밖에 아저씨 손짓을 해가며 전철과 나란히 달리기 시합을 하는 안타까운 광경 앞에 사람들 하나같이 탄성을 지르며 터질 듯한 웃음으로 아쉬움을 대신했습니다 인정 많은 기관사 몇 발짝 움직이던 기차를 멈춰세워 다시 한 번 문이..

한줄 詩 2021.06.30

필요 이상의 호기심 - 박순호

필요 이상의 호기심 - 박순호 햇빛이 펄럭거린다 타락한 웃음, 검은 어깻죽지에도 불의 혀가 핥고 간 흰 재 위에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과묵한 표정 앞으로 두 팔을 펼치는 찬란 쳐내고 쳐내도 거친 표현이 웃자란다 나는 몸을 낮추고 깨지기 쉬운 가장자리부터 약속되어 있지 않는 모든 것 고여 있는 침묵을 움켜쥐지만 어딘가에는 차가운 성질이 숨어 있고 막상 내가 꺼내놓은 물건들마다 싸구려 냄새가 진동한다 쓸쓸하기 짝이 없는 건방진 말투 필요 이상의 호기심 애초부터 싹수가 노란 아이들은 그늘을 늘려갔고 즉흥적인 기분은 대부분 찢겨져 파기된다 안개를 들춰내고 푸른 줄기를 꽂아놓는다면 서정이 되는가 그렇다면 바싹 마른 잎을 조금 더 붙잡아둘 수 있을까 때로 웃음만으론 해결되지 않는 일들 문서로 꾸며진 일련의 협박들 ..

한줄 詩 2021.06.30

미자의 모자 - 이산하

미자의 모자 - 이산하 시를 쓸 때마다 이창동 감독의 명화 가 떠오른다. 잔잔한 강물 위로 엎어진 시체 하나가 떠내려온다. 하늘을 바로 보지 못하고 죽어서도 엎어져 있다. 멀리서 내 앞으로 운구하듯 천천히 다가오면 마침내 영화 제목이 수면 위에서 잔잔하게 일렁거린다. 시와 그리고 시체.... 언제든 예기치 않은 것들이 내 앞으로 떠내려온다. 진실은 수면 아래에 숨어 있다는 듯 얼굴을 가리고 시는 생사가 같은 날이라는 듯 강물이 운구하고 그렇게 얼굴이 사라져야 비로소 실체가 드러난다는 듯 마지막으로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무심히 흘러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물이 표정을 바꾸지 않을지라도 단지 떠내려가는 것만 보여주는 게 시는 아닐지라도 결국 세상의 모든 시도 수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미자의 모자처럼 물에..

한줄 詩 2021.06.29

늙은 남자 - 임성용

늙은 남자 - 임성용 종각에서 종로 3가까지 서울의 도심 일대를 태극기를 든 늙은 남자들이 점령한다 늙은 남자가 탑골공원에서 성매매를 하려다 돌아선다 그럴 때면 눈이 먼 비둘기가 더 슬프다 술에 취해 비척거리는 우산을 보았다 우산을 버린 늙은 남자가 국밥을 먹고 어슬렁거린다 늙은 남자가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기세등등하다 젊은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고 조심스레 피해 간다 주먹만 남은 눈동자가 흘러내린다 검은 버섯이 흘러내린 듯 골목이 질척인다 동구 밖 오래된 느티나무가 죽었다 넓고 다정한 그늘이 떠나고 막연한 계절이다 *시집/ 흐린 저녁의 말들/ 반걸음 적암 - 임성용 강에서 태어난 안개는 여태 걷지 못하고 지난밤의 고요를 덮고 있었다 버드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 하나가 성긴 바람의 그물에서 빠져..

한줄 詩 2021.06.29

입산 - 강영환

입산 - 강영환 눈을 맑히기 위해 산에 들었다 비 온 뒤 숲은 깊어지고 고요하다 갖은 잎들이 흔들리면서 아는 체 눈에 든 나쁜 소리들을 지워가고 엽록소로 향기를 데려 와 코를 세워 준다. 각자 틈새 슬금슬금 들여다보는 하늘빛도 회색 벽에 갇혀 졸아든 살갗을 터주고 신경 끝까지 따라와 손등이 맑아졌다 산길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가고 보이지 않던 새소리가 몸에 들어 와 뜻풀이 해보라며 난해하게 지저귀었다 어찌 알 수 있을까 그 해박한 깊이를 어쩌다 한 번 산에 들어 사는 눈에는 풀잎에 떠는 바람조차 어둠인 것을 온 몸이 산으로 가득찬 가벼움으로 하늘을 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는 내 눈을 깎아 귀를 넣고 작은 바늘 하나 얻어 가리다 도시 날카로운 모서리에 상처입은 사람들은 숲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나도 가..

한줄 詩 2021.06.29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 박주하 시집

요 근래 쫄깃쫄깃한 이 시집을 읽느라 더위 느낄 겨를이 없다. 라는 제목 또한 딱 어울린다. 사람도 이름 하나로 평생을 가듯 시집도 세상에 나올 때 제목이 참 중요하다. 백석의 시집 이 백 년이 다 되어 가지만 한국 문학 불세출의 시집 제목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내 이름에 심한 컴플렉스가 있어서 사람이든 시집이든 좋은 타이틀에 눈길이 가는 편이다. 이젠 이름으로 인한 불만을 놓을 때도 되었건만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이름에 대한 컴플렉스를 벗지 못할 것이다. 박주하 시인의 본명은 박인숙, 동명이인의 시인이 있어서 아님 이름이 너무 흔해서 필명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시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시도 잘 쓴다. 몇 편 읽어 보면 이 시인의 시적 내공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시가 찰지다고 해야 하나? 내 ..

네줄 冊 2021.06.28

숨겨둔 오지(奧地) - 배정숙

숨겨둔 오지(奧地) - 배정숙 보리앵두 제 풀에 익어 떨어지던 여름이 안으로 걸어 잠근 빗장의 암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더딘 저녁상에 잰걸음으로 와서 고꾸라지던 허기의 붉은 발목 그 왼쪽은 늘 가을 쪽으로 기울고 싶었습니다 장독대 옆 정구지꽃 잘 퍼진 흰 쌀밥에 흘러간 시간이 배고파 칭얼댑니다 어머니가 읽고 또 읽고 유일신으로 신봉하시던 콩밭고랑 경전 개망초꽃 노란 눈알만 극구 제철 만났습니다 어머니 하고 불러보는 목젖 밑으로 울컥 솟는 초저녁 달 발아래로 엎어지는 눈물 냄새 날갯죽지 느슨하게 풀어놓고 싫어요- 아니오- 맘껏 외쳐도 덜미가 편안한 안전지대 이제 풋감 같은 큰 누이가 살이 오르던 찰진 시간을 어디에 숨겨놓고 바람이 편히 잠 들까요 마지막 모음의 탯자리까지 잃어버리고 허접한 부리를 어디에 묻..

한줄 詩 2021.06.28

관계에 관한 짧은 검색 - 천수호

관계에 관한 짧은 검색 - 천수호 나막신만한 배들이 정박해 있는 낙동강 하구언 작은 나루에 짧은 철로 두 개가 강물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잿빛 물은 깊고 철로는 해맑은데 나는 멀리 가야 할 사람 철로 끝에 가만가만 발끝도 대어보고 손끝으로 밀어봐도 쓰임이라는 건 도저히 잡히지 않고 투신이라는 벚꽃 잎만 낭자하게 날리는 사월 물결이 깨웠다 재웠다 하는 강물 위 물과 철로의 관계는 검색되지 않지만 배와 철로는 금방 닿을 수 있다 배를 미는 철로, 배를 맞는 철로, 배를 들어올리는 철로 가볍게 검색대를 통과하는 사람처럼 배를 한 번 들어올렸다가 내리는 관계 쓰임을 모르는 철로가 곤두박질친 바닷물의 합수 지역 강은 짐이 없고 바다는 챙이 큰 구름을 짐처럼 이고 있고 저 배와 관계없는 나는 구름보다 멀리 갈 ..

한줄 詩 2021.06.28

순록이 있는 창밖 - 이자규

순록이 있는 창밖 - 이자규 술 한 병의 노동과 구름과자가 자유였다 그의 침상에 혈압계 살피는 발길들이 분홍 꽃병에 물을 채우고 갔다 마음관이 녹슬어 굳은 지 오래 고지혈 보일러 관 피떡이 공사 불가능인지 오래 아껴둔 동지팥죽 그릇이 얼어 터졌다 수도관 터져 폭탄 파열을 첫새벽에 홀로 감당해 보는 맛, 얼음은 천장에 부딪치는 반작용으로 내 정수리를 때렸다 우주로 연결된 모든 파이프의 통설이 각인되는 순간 다시 그 얼음 알을 천천히 입에 넣었다, 뜨거웠다 옛집 행랑채 처마 밑까지 쌓아올린 장작더미, 쇠죽솥 활활 타던 아궁이에 장작을 던지듯 팥죽 얹은 제단에 촛불을 올렸다 고향 산의 구들장 들어낸 곳이 명당자리라 했다 관과 관은 피와 물의 언어라는 것 거짓으로라도 순환되어야 할 흰 털 짐승을 몰고 불빛 하나..

한줄 詩 2021.06.27

소심한 후회 - 박형욱

소심한 후회 - 박형욱 쇠비름 개망초 광대나물 바랭이,,,, 마당가에 잡초를 뽑는다 결국 함께 갈 수 없다고 그런 나그네들이라고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통성명하지 말 것을 악수를 나누며 건네진 온기가 아직 말초에 남아 있는데 지갑 속에 차곡차곡 모아 놓은 명함들 꺼내보면 다시 만날 사람 몇이나 될까 공연하게 휴지통으로 던져버린 욕심과 체면의 수인사 알고 보면 다 사연 있고 나쁜 사람 드물 듯이 도감 펼쳐 보면 약초 아닌 잡초 없는데 미워서가 아니다 쓸모없어서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수 없어서 내 마음 온전히 다 줄 수 없어서 산란한 마음 번잡해서 뽑는다 보는 이 없어도 괜시리 아픈 마당가 풀을 뽑는다 *시집/ 이름을 달고 사는 것들의 슬픔/ 지혜 낭만에 대하여 - 박형욱 논둑길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 ..

한줄 詩 2021.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