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 박주하 시집

마루안 2021. 6. 28. 22:03

 

 

 

요 근래 쫄깃쫄깃한 이 시집을 읽느라 더위 느낄 겨를이 없다.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라는 제목 또한 딱 어울린다. 사람도 이름 하나로 평생을 가듯 시집도 세상에 나올 때 제목이 참 중요하다.

 

백석의 시집 <사슴>이 백 년이 다 되어 가지만 한국 문학 불세출의 시집 제목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내 이름에 심한 컴플렉스가 있어서 사람이든 시집이든 좋은 타이틀에 눈길이 가는 편이다. 이젠 이름으로 인한 불만을 놓을 때도 되었건만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이름에 대한 컴플렉스를 벗지 못할 것이다.

 

박주하 시인의 본명은 박인숙, 동명이인의 시인이 있어서 아님 이름이 너무 흔해서 필명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시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시도 잘 쓴다. 몇 편 읽어 보면 이 시인의 시적 내공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시가 찰지다고 해야 하나? 내 능력으로는 문학적으로 딱히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 하겠다. 눈과 입에 쫄깃하게 달라 붙어 음미하게 만드는 찰진 시들이다. 메이저 출판사의 시집이 주도하는 틈바구니에서 이런 시집을 만나면 보석을 발견한 것마냥 반갑고 설렌다.

 


더 멀리 가 봅시다
가장 멀리 가는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멀리 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각자 자기소개는 하지 맙시다
완벽한 하나의 사건처럼
순식간에 불거졌다가 사라집시다
시간이란 슬픈 눈망울을 버리고
흘러내리는 것은 목숨을 만져 보는 일
전생에서도 잊지 못한 미소를 생각하며
최대한 멀리 뛰어내려 봅시다
서로의 어깨를 부축하지도 말고
젖을수록 단단해지는 돌멩이처럼
이 밤을 훌쩍 넘어갑시다
거짓말을 들은 기색 없이
서로의 눈물만 들고 바닥으로 달아납시다
바닥은 힘이 없으니 장렬하게 무너집시다
불빛이 비에 젖어 번지는
저 길바닥의 무늬 속으로 사라집시다

 

*시/ 빗방울들/ 전문

 

초기 시부터 박주하의 시는 다소 어둡다. 이것도 시인에게 속일 수 없는 일종의 정체성이다. 그럼에도 그 어둠이 마냥 불편하지 않는 것은 이 시인의 삶이 긍정적이어서다. 누구에게나 어둠과 환함의 양면성이 있겠지만 이 시인의 정서는 어둠이 더 짙다.

 

시종일관 그의 눈길은 낮은 곳을 향한다. 시에서 그게 느껴진다. 시집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도 하마터면 놓칠 뻔한 오태환 시인의 추천사를 책 뒤편에서 발견했다. 읽는 동안 내가 느꼈던 감정을 제대로 짚었다. 

 

*내성(內省)의 쓸쓸한 깊이와 처연한 환멸, 시집을 펼쳐 든 첫 번째 인상이다. 젊을 무렵, 어쩌면 화쇄류처럼 분류하는 운명에 가파르게 맞섰던 그녀의 그에 대응하는 자세가 이제 이처럼 외롭고 고즈넉하다. 인환(人寰)의 봄날 저녁, 내부의 어둠을 응시하면서 전신으로 운명의 등피(燈皮)를 닦고 있을 박주하라는 텍스트와 개성은 더 화창하게 개어도 좋을 터이다. -오태환 시인 추천사

 

內省, 화쇄류, 人寰, 燈皮 등 낯선 단어를 쓰고도 내부의 어둠을 제대로 알아 본다. 역시 시인이라 다르다. 나처럼 어리숙한 독자는 비평할 생각에 앞서 닥치고 읽을 일이다. 무조건 찬사도 금물이다. 그러나 자주 꺼내 읽어 볼 만한 시집이라는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