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숨겨둔 오지(奧地) - 배정숙

마루안 2021. 6. 28. 21:47

 

 

숨겨둔 오지(奧地) - 배정숙


보리앵두 제 풀에 익어 떨어지던 여름이
안으로 걸어 잠근 빗장의 암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더딘 저녁상에 잰걸음으로 와서 고꾸라지던 허기의 붉은 발목
그 왼쪽은 늘 가을 쪽으로 기울고 싶었습니다

장독대 옆 정구지꽃 잘 퍼진 흰 쌀밥에 흘러간 시간이 배고파 칭얼댑니다
어머니가 읽고 또 읽고 유일신으로 신봉하시던 콩밭고랑 경전
개망초꽃 노란 눈알만 극구 제철 만났습니다

어머니 하고 불러보는 목젖 밑으로 울컥 솟는 초저녁 달
발아래로 엎어지는 눈물 냄새

날갯죽지 느슨하게 풀어놓고
싫어요-
아니오-
맘껏 외쳐도 덜미가 편안한 안전지대

이제
풋감 같은 큰 누이가 살이 오르던 찰진 시간을 어디에 숨겨놓고 바람이 편히 잠 들까요
마지막 모음의 탯자리까지 잃어버리고 허접한 부리를 어디에 묻고 울까요
뼛속까지 시린 이 허한 기운은 무엇을 빌려 다스릴까요

지천으로 남기고 가는 소쩍새 울음 소등하자 버짐 핀 소년의 귀경길이 뿌옇게 지워집니다


*시집/ 좁은 골목에서 편견을 학습했다/ 시와표현

 

 

 

 

 

 

애월(涯月)에 닿는 길 - 배정숙


내려앉은 시소의 기울기가 막무가내 봄의 각도입니다
꽃멀미로 녹작지근한 그 밤에는 성에꽃 밟히는 겨울을 짐작할 수 없지요

동그랗게 가두어진 마음
달콤하지만 어석거리는 기억을 떠메고 관성의 길을 내고 있습니다
가끔은 몸 어딘가를 통과하지 못한 통증이 있었으나 내일까지 기다리면 날개로 진화한다는 믿음
그냥 껴안고 며칠을 보냅니다

꿈속의 물가
달이 얼마나 차갑게 찰랑대던지요
벗어놓은 나를 불러들이는 소리도
밖에서 나를 불러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귀를 자른 빈센트 반 고흐를 사랑하게 됩니다
사시(斜視)의 불온한 시선 앞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요

고목도 늘 물기를 머금고 흔들리며 자라고
바람은 그런 나의 고독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자랍니다

눈먼 바람이 헛배가 부풀어 오르자 폐쇄회로 속의 뒷모습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구름의 이름과 파랑새의 얼굴과 최면의 그림자가 닮아있는 것이 보입니다

봄볕 탐하여 함부로 몸 덥힌 죄
발목까지 잠기는 공(空)
다 하여도 닿지 못하는 곳

상심하는 노을이 날개에 역린 하나 박아주네요
물가에 내놓은 나를 타이르고 어르며 데려오라고

옆으로 접어든 길에는 강물이 달과 조금 떨어져 흘러서 아슬아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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