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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가지 못한 젊은이의 몽정 - 정경훈

파리를 가지 못한 젊은이의 몽정 - 정경훈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보도블록을 걷다가 엊그제 구두를 밟고 지나간 말라뮤트가 생각나서 괜히 울컥할 때가 있다 욕봤다 왜 하필 전봇대를 차 본다 있는 힘껏 디딤 발을 딛고 없는 힘껏 공을 상상한다 파리의 한옥과 도시의 몰락 가지 말자고 하면 가지 않았을 텐데 못 간다고 하면 너네들 죽여 패서라도 가야겠다는 태생의 객기 아, 나는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부르며 축구를 했던가 그라운드를 뛰어다닐 때 그리고 부조리가 끝난 후에 가시나를 위하여 바친 러브송은 몇 명의 귓밥을 휘둘렀는가 그 노래방 그 단칸방과 그 냉장고 그 매실과 그 목마름 밤과 달빛에 비치는 그이의 목젖 습관처럼 헤어져도 버릇이 들어 왕래하게 되는 이성의 항구 나는 많이도 버렸다 인사는 각별하게 하지만요 둘..

한줄 詩 2021.06.12

나에게 묻는다 - 이산하

나에게 묻는다 - 이산하 꽃이 대충 피더냐. 이 세상에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소리 내며 피더냐. 이 세상에 시끄러운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어떻게 생겼더냐. 이 세상에 똑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모두 아름답더냐. 이 세상에 아프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다. 그 꽃들이 언제 피고 지더냐. 이 세상의 모든 꽃은 언제나 최초로 피고 최후로 진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마당을 쓸며 - 이산하 옛날 할아버지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부터 쓸었다. 매일 쓸지만 어느새 또 어지럽다. 오랜만에 집 청소를 한다. 잠시 두 가지 방법을 놓고 고민한다. 빗자루로 쓰레기를 밖으로 밀어내는 것과 진공청소기로 쓰레기를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먼저 밖으로 배척하는 것은 오랜 시간 빗자루만 자꾸 닳고 ..

한줄 詩 2021.06.12

바다 - 이규리

바다 - 이규리 새벽빛을 오래 바라보다가 볶은 콩 네 알을 씹으며 속쓰림을 달랬다 우리는 아침을 함께 본 적이 없다 데려오지 못하는 아침에게 질문하는 대신 나는 답을 줄여나간다 내가 원하는 날짜가 이 생엔 없을 것 새벽빛은 보라와 실어와 분홍의 순서였고 마음은 적요와 파랑과 고립의 순이었다 배들이 떠 있을 뿐 나아가지 않는 평면을 종일 바라보았다 그런 것 적막이야 나의 말도 두 개의 흔들림과 두 번의 수평 흔들리지 않는 배들은 고통이 아래에 있을까 마음은 무엇입니까 어린 사람이 큰 사람에게 물었다는데 갈 때는 보이는 쪽, 올 때는 어두운 쪽 모르긴 해도 누구나 흔들리고 있었을 것 잘하려던 아침은 울곤 하여 잘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마음이 나을 것이다 내가 점점 사소한 일이 되었다는 걸 잊었다 해도 *시집..

한줄 詩 2021.06.11

진보적 노인 - 이필재

제목만 보면 팔순을 앞둔 사람의 인생 회고록처럼 들릴 수 있겠다. 저자 이필재는 1958년 개띠다. 요즘 60대를 노인이라고 하기엔 좀 민망하지만 책 제목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여긴다. 우선 이라는 제목에 딱 꽂혔다. 제목도 좋고 깊이 공감 가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런 책을 읽으면 저자가 궁금해진다. 이필재는 서울고를 나와 연세대에서 언론학 학사와 석사를 졸업하고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언론사에 입사한다. 기자로 복무하다 2013년 쉰다섯에 정년퇴직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여기까지의 약력을 보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류의 사람이다. 나는 강성 보수주의자와 타종교를 배척하는 기독교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자는 기독교인이면서 꽤나 진보적이다. 한국의 기득권 동맹에 기생하는 개신교 목사들이 종교 자영업자..

네줄 冊 2021.06.10

지구로 달려온 떨림 - 김익진

지구로 달려온 떨림 - 김익진 그를 인용하지 말라 차가운 어둠 속의 불일 뿐이다 허허망망 달리다 보니 네가 본 화염이다 그를 평범한 시선으로 보아라 그는 어느 창문에도 얼룩을 남기지 않는다 웅크리다 직교하는 빛일 뿐이다 그는 진원지에서 뜨거웠다 차가움의 극한을 뚫고 지구로 달려온 떨림이다 어둠이 전부일 때부터 그 없이는 아무 날도 없었다 그는 세상보다 빨라 언제나 어디서나 혼자였다 너희는 모두 그로부터 왔다 모든 기술도 그로 이루어졌다 그에게는 신화 같은 수백억 광년이 있다 그 세월이 있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 그 없이는 아무 날도 없다 *시집/ 사람의 만남으로 하늘엔 구멍이 나고/ 천년의시작 우주의 격자 - 김익진 우주의 장엄함 속에 우리의 삶은 미미하고 순간적이다 별빛 아래 숨겨진 각자의 비밀들 ..

한줄 詩 2021.06.10

풍경 속에 나를 넣는다 - 피재현

풍경 속에 나를 넣는다 - 피재현 허청허청 문상 다녀오셔서 큰 마루에 대자로 누우시던 조부님 양은 주전자 들고 불알도 덜 영근 내가 밭둑길 걸어 퍼 나르던 조부님 막걸리 연고도 없는 저승에서는 누가 나 대신 술심부름 할까 옛 풍경 속에 나를 넣는다 몇몇 우화들을 함께 넣는다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이를테면 잊어버린 것들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 이를테면, 십수 년 만에 돌아 온 큰누나의 분 냄새 같은 것, 낯선 사내에게 '매형'이라고 처음 불러보던 이상한 기표(記表) 한 번도 주인공인 적 없었던 풍경 속에서 나를 빼내 온다 내가 없는 풍경 속에서 도화(桃花) 진다 할아버지 돌아가신다 *시집, 우는 시간, 애지출판 부고 - 피재현 문상 가서 허기를 용서하는 데 오래..

한줄 詩 2021.06.09

타인의 삶 - 오두섭

타인의 삶 - 오두섭 불 꺼진 날이 왜 많은지, 알려고 하지 않은 창가의 밤 서쪽 외벽을 타고 온 해가 모서리로 떨어지면서 짙은 그림자를 남기며 나뭇가지들이 그곳을 기웃거리는 그때 저 창이 오늘은 왜 열려 있는지, 어쩌다가 무심코 열려서 나와 눈이 마주칠 뻔한 풍경의 계단 아래로 슬그머니 내려가서 올려다 보면 혼자 레몬 즙을 짜고 있거나, 시집의 한 쪽을 반복해서 읽고 있거나, 그러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거나, 남자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있을지도, 둘이 함께할 날들에 관해 심각한 담화를 나누고 있는 중인지도, 갑자기 외출을 서두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내 화풍은 사실화에 닮아 있지만 도대체 옷을 벗지 않는 피사체들 힐끗 눈 흘겨보는 그이의 우편함 희미한 불빛에 묻어 나오는 정체 모를 소리..

한줄 詩 2021.06.08

내 안에 봉인된 삶이 있다 - 박남준

내 안에 봉인된 삶이 있다 - 박남준 마당 앞 울타리 위 죽은 매화나무와 때죽나무 긴 그늘을 베어 세운 작은 솟대 새의 몸이었던 푸른 나이를 기억하므로 노래에 가닿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 그의 사랑과 죽음 슬픔과 기쁨 또한 몸에 들여놓는 것이리 내 안에 봉인된 전생이 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겠다 내가 새의 이전을 알고 있듯이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걷는사람 말뚝과 반란 - 박남준 고정되어 있는 운명이 있다 누군가 다가와 그의 목에 닻줄을 매고 묶어 놓기를 기다리는 그렇게 해야만 목숨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바닷가 움직일 수 없는 말뚝 너머 물이 들고 물이 난다 닻줄의 시선으로 눈어림을 적신다 한 번쯤 저 말뚝 송두리째 해일을 꿈꾸었을까 세상의 어느 바닷가 포구에 흔한 말뚝이 외..

한줄 詩 2021.06.07

북한산, 원효봉-백운대-승가봉-족두리봉

원효봉을 거쳐 백운대에 올랐다. 이 길은 정상으로 가는 길 중에 비교적 한산한 코스라 자주 이용한다. 일상에서 사람과 부대끼며 사는데 산에서까지 앞사람 엉덩이만 보며 걷는 것처럼 무료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런 산행이라면 차라리 운동기구가 갖춰진 동네 뒷산을 산책하는 것이 낫다. 어느 건물 벽에 있는 원효봉 안내 글자다. 얼마전까지 연두색 새순이 돋았었는데 어느새 푸른 담쟁이 덩굴이 무성하다. 둘레길과 등산길이 나뉘는 곳이다. 원효봉은 오른쪽으로 가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서암문이다. 죽은 사람을 내보내는 문이라 해서 시구문이라고도 한다. 원효암이다. 작고 아담한 가정집 같은 암자다. 북한산의 절들이 대중과 단절된 절이 대부분인데 이곳은 예외다. 이렇게 열린 절일수록 탐방객은 있는 듯 없는 듯 바람결처럼 흔..

일곱 步 2021.06.05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 양창모

읽으면 저절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책이다. 왕진의사 양창모 선생이 쓴 에세이다. 환자가 병원을 찾는 것이 일반적인데 의사가 직접 집으로 찾아가 진료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담담한 필체로 서술하고 있다. 몸이 불편해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도 있고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이 어려운 첩첩산중에 사는 환자도 있다. 그런 환자를 위해 양창모 선생은 직접 방문해 진료를 하고 처방을 내린다. 환자와 가슴으로 소통하는 따뜻한 의사라는 생각이다. 왜 그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환자가 방문하는데 이렇게 왕진을 가는 것일까. 대단한 소명 의식 때문이 아니라 가능하면 약자와 함께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10년 이상 동네 의사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환자와 함께 하고 있다.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책에..

네줄 冊 2021.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