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떤 이별 - 전인식

마루안 2021. 6. 30. 22:21

 

 

어떤 이별 - 전인식
-구두와 대머리 아저씨


전철이 막 출발하려고 스르르 문이 닫힐 때
이 열차 타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듯
머리가 약간 벗어진 중년의 아저씨
이종범이 2루 도루를 감행할 때의 슬라이딩으로
아슬아슬 한쪽 발이 먼저 닿아 세이프되려는 순간
슬금슬금 움직이던 열차에 결국 사람 대신
벗겨진 구두 한 짝만 타고 말았습니다
처음 신고 나온 반짝거리는 새 구두 한 짝만이
볼일 급한 주인 대신 어디 다녀올 듯
객실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말았습니다
신발을 찾으려, 열차를 잡으려 창밖에 아저씨
손짓을 해가며 전철과 나란히 달리기 시합을 하는
안타까운 광경 앞에 사람들 하나같이 탄성을 지르며
터질 듯한 웃음으로 아쉬움을 대신했습니다
인정 많은 기관사 몇 발짝 움직이던 기차를 멈춰세워
다시 한 번 문이 열렸을 때 그 아저씨 부랴부랴
구두보다 서너 칸 뒤로 탑승에 성공했을 거의 동시에
아저씨 여기 구두요, 하고 누군가가 창밖으로 내던진
구두 한 짝, 주인 대신 승강장에 홀로 남고 말았습니다
웃음보를 터트렸던 사람들 아무도 웃질 않습니다
짧은 순간 서로가 그렇게까지 엇갈려가며
반드시 헤어져야만 될 인연이었나 봅니다 운명이었나 봅니다
헤어지기 위해 아저씨는 새 구두를 신고 나왔고
구두는 또 첫 외출을 하였나 봅니다
구두와 대머리 아저씨의 이별이 이만한데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헤어짐은 오죽이나 할까요
가급적 이별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집/ 검은 해를 보았네/ 불교문예

 

 

 

 

 

 

백률사 - 전인식


그리우면 버릇처럼 찾아가는 절이 있다
숨이 차는 돌계단이 어느 누구의 일생처럼 놓여 있어
반야심경 260자를 돌계단 하나에 한 자씩 외며
올라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
쉬어가라 손 내어주는 소나무에 기대섰다 고개 들면
고무신 자국이 꽃잎으로 돋아나 있는 돌계단마다
할머니 가쁜 숨소리 배어 나온다


나는 안다
툇마루에 빈 장바구니 베고
팔십 평생 잠 같은 잠 처음으로 주무시던 그 날
이승의 마지막 외출 어디 갔다 오셨는지
나는 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잘 부르는 노래의 후렴처럼
잠 없는 새벽 깨어 앉아 다듬어 깎던 향나무 비녀
흰머리 가지런히 묶어 찌르던 날
명부전에 이름 석자 적어놓고 내려온 그 길 그대로
살아서의 소원처럼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잠 주무신 할머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할머니가 부르던 노래 대신 부르며 돌계단 올라 서면
푸른 하늘밖에는 볼 것이 없는
있는 것이라곤 부처밖에 없는
그리우면 버릇처럼 찾아가는 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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