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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0호 - 윤석정

로봇 0호 - 윤석정 오십 살 영호 씨는 공허 속의 고물, 버린 짐짝 같은 흉물이 됐다 주물공장이 헛물켜던 때부터였다 영호 씨의 관절이 움직였던 모터가 멈췄다 모터에서 번쩍 수백만 볼트의 불꽃이 터졌다 사랑의 기억장치가 리셋됐다 영호 씨 모터를 누볐던 기름이 제자리에 멈췄다 기름 한 방울 한 방울 가슴 언저리로 새어 나왔고 영호 씨는 급속도로 녹슬었다 최신의 모터를 장착했던 첨단의 과거 영호 씨는 사랑의 형식을 반복하여 생산했고 주물공장은 모든 형식에는 유행이 있다고 했다 유행이 지나면 다른 유행으로 대체되고 또 다른 영호 씨로 교체되는 시스템 속에서 영호 씨의 기억장치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영호 씨는 반복의 형식을 반복할 뿐 반복되지 않는 사랑의 형식이 주입된 적이 없었다 사랑을 포기한 사람처럼 비에 ..

한줄 詩 2021.06.27

개망초 연대기 - 김재룡 시집

지난 몇 달 동안 오래 붙들고 있던 시집을 이제야 내려 놓는다. 작년 가을쯤이었나. 헌책방에 갔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헌책으로 팔리기에는 아직 싱싱한 새책이다. 이런 책을 만나면 깨끗이 읽고 헌책방으로 데려다 준 마음씨 고운 독자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서점엘 갈 때마다 신간 코너에서 시집을 들춰보기에 분명 이 시집도 내 손길에 스쳤을 것이다. 특히 최근에 시집을 꾸준히 내고 있는 걷는사람, 반걸음, 달아실, 상상인 등에서 나온 시집은 빼놓지 않고 들춰본다. 모든 시집을 다 읽을 수는 없어도 최소한 제목과 약력과 목차 정도는 훑어 보는 편이다. 그렇게 스쳐 지났던 시집이 우연히 헌책방에서 다시 인연이 된 것이다. 다소 두꺼운 시집을 큰 기대 없이 들췄다가 숨이 턱 막혔다. 여백이 많지 않은 빽빽한 문장을..

네줄 冊 2021.06.26

세습의 기술 - 조기조

세습의 기술 - 조기조 척박하든 기름지든 태어난 자리에서 생을 다하는 너는 붉은 꽃을 피워 말한다 염치없이 챙기기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붉은 열매를 달고 말한다 무턱대고 주기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다른 이의 욕망보다 자신의 욕망으로 살아가는 너는 말한다 대롱의 욕망으로 꿀을 만들고 부리의 욕망으로 과육을 익히고 바람의 욕망으로 씨앗을 말리며 자가수분처럼 세습처럼 음탕한 것은 없다고 붉은 씨앗을 날리며 너는 말한다. *시집/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도서출판 b 기술자의 가방 - 조기조 기술자의 가방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당신을 꼼짝 못 하게 만든 문제가 해결만 된다면 기뻐할 뿐 당신을 애태우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짜증을 낼 뿐 나사 하나 바꾸고 몇만 원 받는다고 사기..

한줄 詩 2021.06.26

안구주사를 맞고 - 황동규

안구주사를 맞고 - 황동규 한 달에 한 번 병원 침대에 누워 외눈 덮개로 얼굴 가리고 황반변성 안구주사를 맞고 거즈로 덮은 눈과 산동산(散瞳)약 넣어 초점 잃은 눈 위에 안경을 얹고 희미하게 놓인 구두 찾아 꿰 신고 병원을 나선다. 어른거리는 붉은 불빛, 걸음을 멈춘다. 9년 전인가 서천군 마량 선창가, 생선 부리는 배에 걸린 늘어진 깃발들이 안개 속에 갑오징어들처럼 매달려 있을 때 생선 잔뜩 실은 자전거 무게에 눌려 핸들 붙잡고 꼼짝없이 서 있던 사내, 눈은 뜨고 있었던가? 잠깐이 한참이었다. 안개 저편에서 인기척처럼 경적이 울리고 핸들에 매달린 그가 자전거 바퀴에 끌려간 뒤에도 나는 거기 서 있었다. 용케 넘어지지 않고 안개 밖으로 빠져나갔군. 걸음 떼는 순간 내가 그만 발 헛딛고 비틀거렸지. 동공 ..

한줄 詩 2021.06.26

죄가 있다, 살아야겠다 - 이문재

죄가 있다, 살아야겠다 - 이문재 죄짓고 살자 오늘 밤 아기 예수 다시 오시도록 죄 많이 지으며 살자 원수를 미워하자 자비로부터 멀어지자 오늘부터 부처님 외롭지 않으시도록 우리 죄짓되 죄다운 죄 지으며 살자 원수를 저주하되 원수다운 원수를 저주하자 물론 법도 어기자 어길 만한 법 어겨서 법이 법다워질 수 있도록 법도 어기며 살자 죄가 있다 살아봐야겠다 보란 듯이 한번 살아봐야겠다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얼굴 - 이문재 -아주 낯익은 낯선 이야기 내 얼굴은 나를 향하지 못한다 내 눈은 내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 손은 내 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얼굴은 남의 것이다 손은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기 위한 것 누군가에게 내밀기 위한 것이다 입과 코가 그렇고 두 귀는 물론 두 발도 그러하다 안 못지않게 바..

한줄 詩 2021.06.26

흐르는 강물처럼 - 김재룡

흐르는 강물처럼 - 김재룡 사랑, 그런 거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사랑이라는 건 목숨을 거는 거예요.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 것이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속절없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 수 없었으므로 내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죽었다. 그날이었다. 천년의 세월은커녕 단 하루도 기약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안녕. 그렇게 내 그대를 떠났던 것은 세상의 처음이 궁금해서였을 터이다. 애초에 뒤돌아 볼 일이 아니었다. 떠나온 것들에 대하여 뒤돌아보는 것도 어쩔 수 없겠다. 작정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는 동안이겠다. 그대 또한 깊어가는 강물의 가장 깊은 곳만큼 아주 조금은 흔들렸으리라. 죽어 떠나간 것들이 살아 있는 것들을 뒤돌아보는 것이다. 떠나야 만날 수 있는 세상의 끝..

한줄 詩 2021.06.25

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 - 정인진

흥미로운 내용이라 단숨에 읽은 책이다. 는 판사 출신 정인진 변호사가 생에 처음 쓴 책이다. 24년 간 판사 생활을 했고 지금은 법무법인 바른의 변호사인 저자는 내년이면 칠순이 된다. 그가 경향신문에 연재한 칼럼이라 이미 읽은 글이 여럿이지만 다시 읽어도 두루두루 공감이 간다. 오랜 기간 판사로 밥벌이를 했고 지금은 변호사로 일 하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밥벌이에 관한 명문장이 있다. . 일반인에게는 생소하지만 재판 후에 남는 판결문은 읽기도 어렵다. 또 재판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읽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저자는 판결문에 관해서도 아주 세밀하게 언급한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 그러고 보면 판사의 밥벌이도 쉽지는 않다. 그 외에는 거나 등을 설명하면서 판사가 작성한 판결은 승복할 ..

네줄 冊 2021.06.22

유월의 구름 - 최준

유월의 구름 - 최준 흙먼지 뒤집어쓰고도 하얗게, 환하게 웃던 아까시꽃이 너무 눈부셨을까 길이 피를 더렵혔다고 이제 그만 객석에서 일어서야 한다고 극장 뒷문으로 공기처럼 조용히 사라지던 그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스크린에서 계속되는 도살 관객들은 너무 잔혹하다며 아우성이었는데 어떤 매몰지도 그를 기다리지 않아 소리 없는 세계로 가고자 했던 걸까 나이가 서른 살이었던 건 그가 이십 대의 산맥을 지나왔다는 것 모든 소멸을 무사히 버텨냈다는 것, 그러니 자 이제 어디로 간다? 복수로 무거워진 배를 끌어안고서는 복수를 꿈꿀 노릇도 이미 아니었는데 총도 아니고 칼도 아닌 말씀으로 내일을 예언하던 일기예보 믿지 못하고 멈출 수도 없어 그는 허공에 발을 내딛기로 했다 내 귀가 너무 커져서 그래 옥상을 긋고 지나..

한줄 詩 2021.06.22

현수막의 궁금증 - 고태관

현수막의 궁금증 - 고태관 언제 다 마를까 비에 젖은 글자가 비스듬하게 번진다 소액대출이자없는행복을붙잡으세요 하루에 한 마디씩 매달 수 있다면 스스로 내걸리는 사람도 있겠지 침묵이 되어 하루에 하나씩 묶인 줄을 풀어낸다면 되돌리고 싶은 고해성사 같을까 후회처럼 아무도 잠들지 못하는 밤 사람들은 잠든 나를 구경하러 오겠지 모두가 잠든 밤에 부스스 깨어난 나는 사람들의 헝클어진 이불을 덮어 주러 다닐 거야 하루에 한 명씩 죽어야 한다면 다음 날 한 명씩 살릴 수 있다면 어제 죽은 내가 오늘 살아날 수 있을까 기회의땅으로아메리칸드림미국워킹홀리데이 떠난 사람은 내 차례가 왔다고 기뻐할까 도착한 곳에서 먼저 떠나온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돌아온 사람은 보고 싶은 사람을 찾지만 떠나고 없다 길을 나선 사람과 돌아오..

한줄 詩 2021.06.21

눈물이 나오는 순서 - 김태완

눈물이 나오는 순서 - 김태완 늙은 엄니가 운다 늙은 엄니 고개 떨구고 온몸을 바닥에 내려놓고 숨죽여 운다 엄니는 늘 그렇게 울었다 슬프고 절망스러울 때,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을 때, 믿었던 내가 엄니 가슴에 못질했을 때, 내가 알고 있는 엄니는 늘 그런 모습으로 주저앉아 모든 슬픔을 엄니 탓으로 만들었다 늙은 엄니가 나 땜에 운다 어릴 적 보아왔던 그 모습으로 숨죽여 운다 이제는 다 큰 자식 놈 눈치보며 성치 않은 몸 예전보다 더 크게 내려놓고 작은 체구 녹아내린 눈사람처럼 온몸의 상처를 끌어안고 엄니가 운다 늙은 엄니가 흘리는 눈물이 주름을 타고 덜컹거리며 바닥에 떨어진다 늙은 엄니는 나 땜에 울고 나는 아직도 나 땜에 운다 내가 나 땜에 우는 동안 엄니는 남 같은 자식 위해 조심스레 달구어진 ..

한줄 詩 2021.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