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순록이 있는 창밖 - 이자규

마루안 2021. 6. 27. 19:40

 

 

순록이 있는 창밖 - 이자규

 

 

술 한 병의 노동과 구름과자가 자유였다 그의 침상에 혈압계 살피는 발길들이 분홍 꽃병에 물을 채우고 갔다

 

마음관이 녹슬어 굳은 지 오래 고지혈 보일러 관 피떡이 공사 불가능인지 오래 아껴둔 동지팥죽 그릇이 얼어 터졌다

 

수도관 터져 폭탄 파열을 첫새벽에 홀로 감당해 보는 맛, 얼음은 천장에 부딪치는 반작용으로 내 정수리를 때렸다 우주로 연결된 모든 파이프의 통설이 각인되는 순간 다시 그 얼음 알을 천천히 입에 넣었다, 뜨거웠다

 

옛집 행랑채 처마 밑까지 쌓아올린 장작더미, 쇠죽솥 활활 타던 아궁이에 장작을 던지듯 팥죽 얹은 제단에 촛불을 올렸다 고향 산의 구들장 들어낸 곳이 명당자리라 했다

 

관과 관은 피와 물의 언어라는 것 거짓으로라도

순환되어야 할 흰 털 짐승을 몰고

불빛 하나가 천천히 걸어서 갔다

 

 

*시집/ 아득한 바다, 한때/ 학이사

 

 

 

 

 

 

바닥은 지렁이 뇌를 가졌다 - 이자규

 

 

발길 없는 길에 까만 지네 형상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를 목적지까지 안내해야 할 바닥은 상통하는 구조를 미리 알기에 기어서 사는 이치를 견뎌냈을 것이다

 

나 떠나거든, 송가를 닮은 바람이 휘청 경고를 주고 가면 소명이라는 듯 혼의 점성으로 군데군데 깜박거리는 배밀이가 족적도 없이 허전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렁이는 죽어서야 척추와 다족형을 가졌다 수만의 개미들이 교미 상태로 집결된 채 거대한 시체를 운구하는 행렬 혼연일체의 길은 오로지 한 방향이라는 것

 

기어서 사는 신념의 하루가 저물 무렵, 왼발 의족으로 육상 선수가 된 나비가 텅 빈 운동장을 돌고 있다 날고 있다

 

무수한 날개들의 환한 오후가 개미집 입구를 비추고 있을 때 하늘 보고 누운 지렁이의 그 먹이 장(葬) 상여를 헤아려 보았다

 

 

 

 

 

# 이자규 시인은 경남 하동 출생으로 2001년 <시안>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물 치는 여자>, <돌과 나비>, <아득한 바다, 한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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