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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바깥 - 권상진

당신의 바깥 - 권상진 자기가 삼킨 눈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안다 딱 그의 키만큼 울고 갔다 염장이가 그를 슬픔과 함께 단단히 묶고 눈물이 새 나가지 않도록 오동나무 관으로 경계를 두르는 동안 죽음을 빙 둘러선 사람들은 그에게 흘러든 어떤 구름에 대해 증언하거나 자신의 몸에 눈금을 그어 보이는 시늉을 했다 막잔을 비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 코끝까지 차오른 눈물에 그가 술잔처럼 일렁이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모두 당신의 바깥에 서 있었다 울고 있었지만 아무도 당신이 술잔에 채워 준 구름을 마시지 않았다 한 이틀 슬픔들이 속속 다녀가고 마지막 날엔 잘게 부서진 눈물이 항아리에 고였다 주목나무 아래 그를 뿌려 두고 남은 이들이 출렁거리면서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합동시집/ 시골시인-K /..

한줄 詩 2021.07.06

네가 빌었던 소원이 나였으면 - 고태관 시집

이름 없는 시인의 시집이 긴 울림을 준다. 은 고태관의 유고 시집이다. 며칠 간 이 시집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지하철에서도 틈틈히 펼쳐 한 편씩 읽는 맛이 대단했다. 처음 만난 시인일지라도 단 한 편만 읽고 빨려 들어가는 시가 있다. 이 시집이 그렇다. 오래 읽을수록, 여러 번 읽을수록 제 맛이 우러나는 좋은 시로 가득하다. 진공 청소기처럼 읽는 이를 빨아 들이는 묘한 흡인력이 있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다가 꼬리를 물고 따라 오는 여운 때문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해서 읽게 만드는 시집이다. 고태관은 생전에 시인보다는 랩퍼로 알려졌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그가 시인이었고 그의 래퍼 활동도 알게 되었다. 시에 곡을 붙여 부르는 것이야 기존에 있었던 일이지만 시를 랩으로 부르는 것은 다소 생소하다. 라..

네줄 冊 2021.07.05

하느님의 시계 - 이상원

하느님의 시계 - 이상원 세상에서 퇴출된 내가 아직 거기 근무 중인 당신과 통화를 한다. 멈추거나 뒷걸음질하는 건 죽음이에요. 분리대를 넘기 전엔 속도를 맞춰가며 앞으로만 가야 해요. 나는 시간의 굴곡을 걸어서 온 사람, 바퀴들의 언어를 알 수도 없었고 지나가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길을 이미 아는 까닭에 북극으로 떠날 채비를 서둘러야 했다. 돌아보지 마세요. 환영(幻影)에 집착하는 눈알들은 도태되고 말거에요. 애당초 눈먼 내게 뒤돌아볼 거울일 있을 리가 없지만, 회춘을 꿈꾸는 누구도 복원의 시점을 대답할 수 없으므로, 하느님의 시계가 거꾸로 돌지 않는다는 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앞서간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바퀴들의 영역을 벗어나 전파가 잘 닿지 않는 산기슭에 접어들자 무수한 발자국의 지문이 화석 된 ..

한줄 詩 2021.07.05

아주 오래된 기억 - 함명춘

아주 오래된 기억 - 함명춘 바람 불면 바람 부는 쪽으로 풍애마을 한쪽 발을 지그 밟고 서있는 느티나무의 가지가 힘없이 기울어지곤 하였다 태양의 억센 팔뚝 안에서 월척같이 뛰어오르는 여름 마을 사람들은 비가 내리기만을 손꼽아 고대했지만 늘 하늘은 굳게 입술을 다물고 기다림의 가지 끝에선 맑은 피 대신 누런 고름이 새어 나왔다 마른 장작개비처럼 갈라진 전답들이 쉬 오지 않는 잠 근처까지 떠밀려 왔다 떠밀려 갔다 몇 평의 그늘을 일구며 바짝 푸른 허리띠를 졸라매는 물오리나무 숲 자꾸만 잔뿌리들은 죽음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고 책보다 배고픔이 더 가득 들어찬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피라미같이 쏟아져 내려가는 하굣길을 따라 무작정 싱경한 열여덟 열아홉 살 자식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따금 어둠의 발자국 소리가 되어..

한줄 詩 2021.07.05

울음의 두께 - 이서린

울음의 두께 - 이서린 아직 태어나지 못한 울음이 있다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이 검고 어두운 바람 소리로 창을 닫아도 커튼을 내려도 사방에서 밀고 들어와 몸을 빨아들이는 울음이 있다 여덟 살의 머리 위로 해는 넘어가고 사람을 삼킨 기차는 길게 울었다 밤길을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기어이 대문에 걸려 흔들리던 조등의 불빛, 각혈 자국 선명한 수돗가엔 빨다 만 옷가지가 흩어졌었다 치자꽃 향기 울컥 몰려 오던 밤의 교정에서 끝내 귀신으로 한 번 보았던 사람, 핏물 어린 입술 깨물며 술잔을 치고 무덤에서 불렀던 이름도 있다 굽은 골목 더듬더듬 손전등도 없이 훌쩍이며 헤어진 길을 뒤짚어 간 시간은 아직 거기 있을까, 세상의 난간에서 펄럭이다 펄럭이다 찢어진 깃발은 그 밤마다 잠들지 못한 짐승이 있다 어쩌면 차마 눈감지..

한줄 詩 2021.07.04

두 자리 - 천양희

두 자리 - 천양희 스스로 속지 않겠다는 마음이 산을 보는 마음이라면 스스로 비우겠다는 마음이 물을 보는 마음일 거라 생각하는데 들을 보는 마음이 산도 물도 아닌 것이 참으로 좋다 살아 있는 서명 같고 말의 축포 같은 참 그것은 너무 많은 마음이니 붉은 꽃처럼 뜨거운 시절을 붉게 피어 견딘다 서로가 견딘 자리는 크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일상의 기적 - 천양희 갈 길은 먼데 무릎에다 인공관절을 넣고 지팡이는 외로 짚고 터벅터벅 서울 사막을 걸어갈 때 울지 않아도 눈이 젖어 있는 낙타처럼 내 발끝도 젖는다 갈 데까지 걸어봐야지 걸을 수 있는 만큼은 가봐야지 요즈음의 내 기적은 이 길에서 저 사잇길로 나아가는 것 딱 한걸음만 옮기고 싶은 고비에서 주저앉고 말았을 때 꿇었던 뒤에도 서서 걸었던 자국 ..

한줄 詩 2021.07.04

걷는 독서 - 박노해 사진전

박노해 시인은 언젠가부터 글 쓰는 일보다 사진 찍는 일에 더 열성을 보이는 작가다. 가슴 저미는 그의 시에 공감했던 터라 이번 사진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가 늘 그랬던 것처럼 새책을 내면서 함께 사진전을 여는 것이다. 그동안 그의 사진이 흑백 위주였는데 이번 사진은 컬러다. 그의 사진과 글을 작은 액자로 제작해 판매도 하고 있다. 코로나로 우울한 시기에 실내에 걸어 두면 공기청정기처럼 마음을 정화하는데 도움이 될 사진들이다. 이번에 나온 책 는 성경책처럼 두껍지만 크기는 손바닥 정도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있는 그답지 않게 다소 덜 효율적인 디자인이 아닌가 싶다. 책 크기가 작다보니 당연 사진도 명함 크기 정도에 머문다. 뭐든 커야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눈이 적응할 정도는 돼야 하는데 아쉽다..

여덟 通 2021.07.04

한영수, 이노우에 코지 사진전 - 그들이 있던 시간

류가헌에서 의미 있는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한영수와 일본인 사진가 이노우에 코지의 2인전이다. 생전에 둘은 일면식도 없었지만 훗날 두 사진가의 자녀들의 눈에 작품이 들어오면서 교류하게 된다. 자녀들은 두 작가의 사진이 유사한 점에 착안해 서로 교류하다 이번 전시가 마련되었다. 두 사람이 활동했던 1950년대와 60년대 서울과 후쿠오카의 풍경을 담았다. 50년대 후쿠오카와 60년대 서울은 전쟁의 후유증을 아직 벗지 못했던 때다. 한영수 선생의 사진은 언제 봐도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작가도 세상을 떠났고 당시의 풍경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이렇게 사진이 남아 옛날을 회상하게 한다. 사진의 위대함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이런 작가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전시장은 두 작가의 일부 유사 작품을 나란히 배치해..

여덟 通 2021.07.04

혼자의 넓이 - 이문재 시집

예전에 기형도의 이라는 산문집에서 이문재 시인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기형도가 찾아간 대구의 장정일이 그랬다. 이문재는 초기 시가 너무 좋아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할 거 같아 슬프다고 한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장정일의 말처럼 이문재 시인의 초기 시가 너무 좋았음은 얼치기 독자인 내가 읽어도 동의가 된다. 그런 차에 이문제 시인의 신작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서점을 찾았다. 평소에는 신간 소식을 접해도 천천히 찾아서 읽지 뭐, 하면서 느긋한 편이다. 아이스크림처럼 시간 지나면 녹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폐기 처분하지도 않을 테지만 서둘러 읽고 싶은 책이 있다. 표지만 만져도 좋은 시집, 단숨에 읽지 않더라도 아니면 잠시 밀쳐두더라도 눈에 띄면 책은 ..

네줄 冊 2021.07.01

동백의 여백 - 박남준

동백의 여백 - 박남준 동박새가 찾아와 쉴 자리가 동백의 여백이다 그늘을 견딜 수 없는 숙명도 있지만 다른 나무의 그늘에 들어야 잎과 꽃의 여백을 만드는 나무가 있다 동백의 여백을 생각한다 혼자 남은 동백은 지독하도록 촘촘하게 모든 여백을 다 지워서 가지를 뻗고 잎을 매달아 그 아래 올 어린 동백의 그늘을 만든다 곁에 다가와 노래하는 자리가 그 사람의 여백일 것이다 여백을 가지고 있는가 누군가의 여백을 위해 스스로 그늘을 가득 채워 버렸는가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걷는사람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 박남준 불시착의 연속에 있었다 바오밥나무들이 점등을 시작한 비상활주로의 길 끝에 사막은 시작되었다 사막이 공간이동으로 뛰어든 이유는 불시착의 그 처음이 발단이었다는 정도로 생략하겠다 그리하여..

한줄 詩 2021.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