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혼자의 넓이 - 이문재 시집

마루안 2021. 7. 1. 22:06

 

 

 

예전에 기형도의 <짧은 여행의 기록>이라는 산문집에서 이문재 시인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기형도가 찾아간 대구의 장정일이 그랬다. 이문재는 초기 시가 너무 좋아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할 거 같아 슬프다고 한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장정일의 말처럼 이문재 시인의 초기 시가 너무 좋았음은 얼치기 독자인 내가 읽어도 동의가 된다. 그런 차에 이문제 시인의 신작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서점을 찾았다. 평소에는 신간 소식을 접해도 천천히 찾아서 읽지 뭐, 하면서 느긋한 편이다.

 

아이스크림처럼 시간 지나면 녹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폐기 처분하지도 않을 테지만 서둘러 읽고 싶은 책이 있다. 표지만 만져도 좋은 시집, 단숨에 읽지 않더라도 아니면 잠시 밀쳐두더라도 눈에 띄면 책은 읽게 되어 있다.

 

그동안 미적거리다 놓친 영화들, 미적거리다 기억에서 사라진 책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어긋난 인연으로 이룰 수 없었던 사랑처럼 책도 영화도 다 인연이 있음을 살아 오면서 실감한다. 순서가 뒤로 밀려서 아님 미뤘다가 영영 잊혀져서 만나지 못한 책이 부지기수다.

 

<혼자의 넓이>라는 쉬우면서 철학적인 제목도 기억에 금방 들어온다. 제목이 너무 어렵거나, 너무 생소하거나, 아님 너무 길어서 읽었는데도 기억을 못하는 시집이 참 많다. 이 시집은 잊어버릴 염려는 없을 듯하다.

 

이 시집에는 시인의 초기 시만큼 좋은 시로 가득하다. 시를 못 쓸 것 같아 슬프다는 장정일의 염려는 기우였다. 나는 지금까지 나온 이문재 시집을 빼놓지 않고 읽었지만 이 시집을 맨 앞에 놓는다. 필사하고 싶은 시가 많다는 것이 그 결론이다.

 

이번 시집에는 유독 혼자라는 단어가 들어간 시 제목이 많이 나온다. 앞부분에 배치한 표제시 혼자의 넓이를 비롯해 혼자와 그 적들, 우리의 혼자, 혼자 울 수 있도록 등과 함께 맨 마지막에는 혼자가 연락했다로 마무리 한다.

 

혼자가 모이면 여럿이 되듯이 시집에 나오는 혼자가 결코 외롭지는 않다. 당장의 편리함만을 쫓다 미래 세대의 행복까지 거덜을 낸 현 세대를 아프게 지적하면서도 혼자의 넓이와 혼자와 그 적들을 기꺼이 품는다.

 

혼자 있어보니

혼자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나는 나 아닌 것으로 나였다

 

*시 <혼자와 그 적들>

 

혼자서는

견디지 못해 여럿입니다

기다리기 힘들어지면

여럿이서 더 먼 데를 바라봅니다

 

*시 <메타세쿼이아>

 

이제는 몸의 일부가 되어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는 세태를 꼬집으며 마음이 놓친 손을 잘 단속하란 충고가 송곳처럼 다가온다. 코로나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현실에서 지친 마음을 추스리는데 청량제 같은 좋은 시집이다. 맨 앞에 실린 시를 옮긴다.

 

 

모란 - 이문재

 

앞뜰이 생기면

두어평 앞뜰이 생기면

옮겨 심으리라

마음속 피고 지던

모란

 

모란이 피어나면

마당에 나가서 보리라

엄동설한에도 피고 지던

그 마음속

백모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