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울음의 두께 - 이서린

마루안 2021. 7. 4. 21:18

 

 

울음의 두께 - 이서린

 

 

아직 태어나지 못한 울음이 있다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이 검고 어두운 바람 소리로 창을 닫아도 커튼을 내려도 사방에서 밀고 들어와 몸을 빨아들이는 울음이 있다

 

여덟 살의 머리 위로 해는 넘어가고 사람을 삼킨 기차는 길게 울었다 밤길을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기어이 대문에 걸려 흔들리던 조등의 불빛, 각혈 자국 선명한 수돗가엔 빨다 만 옷가지가 흩어졌었다 치자꽃 향기 울컥 몰려 오던 밤의 교정에서 끝내 귀신으로 한 번 보았던 사람, 핏물 어린 입술 깨물며 술잔을 치고 무덤에서 불렀던 이름도 있다 굽은 골목 더듬더듬 손전등도 없이 훌쩍이며 헤어진 길을 뒤짚어 간 시간은 아직 거기 있을까, 세상의 난간에서 펄럭이다 펄럭이다 찢어진 깃발은

 

그 밤마다 잠들지 못한 짐승이 있다

어쩌면 차마 눈감지 못한 전생의 울음

 

밤은 곳곳에 늪을 만들어 푹푹 발이 빠지고 백 년 넘은 나무가 안개 속에서 운다

 

세상의 끝을 건너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울음의 두께

나는 이름 하나를 또 보탠다

 

 

*시집/ 그때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파란출판

 

 

 

 

 

 

존재를 켜 두고 있는 중입니다 - 이서린

 

 

구부정한 어깨의 남자가 개를 데리고 산책합니다. 검은 점퍼에 반쯤 대머리 하얀 개와 서성이는 공사장 근처, 거대한 커피숍이 들어설 예정인 저곳은 한때 오도카니 국숫집이 있던 자리, 허허벌판에 국숫집이 생기고 도무지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은 가게 앞 벚나무가 일 년에 한 번 꽃 그늘을 만들면, 국수 삶던 여자는 잠시 나와 이마에 손을 대고 하늘을 보고 나무에 매인 개도 하늘을 보고. 국수를 먹거나 근처를 오가며 매번 보태던 나의 염려에 대답 없이 웃던 여자가 사고로 죽고 국숫집도 사라지고 감쪽같이 사라지고. 전 남편인지 동거남인지 구부정한 어깨의 남자, 여자가 키우던 개를 데려와 가끔 국숫집 있던 자리를 배회한다는군요. 국수 대신 커피가 채워질 자리엔 들썩들썩 사람들이 몰려오겠지요.

 

누가 살다 간 장소를 기억하고 누군가를 떠올릴지도 모를 누군가에 의해 존재는 계속 켜져 있을 테지요.

 

 

 


# 이서린 시인은 경남 마산 출생으로 199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저녁의 내부>, <그때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가 있다. 2007년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느님의 시계 - 이상원  (0) 2021.07.05
아주 오래된 기억 - 함명춘  (0) 2021.07.05
두 자리 - 천양희  (0) 2021.07.04
동백의 여백 - 박남준  (0) 2021.07.01
어떤 이별 - 전인식  (0) 2021.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