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하느님의 시계 - 이상원

마루안 2021. 7. 5. 22:01

 

 

하느님의 시계 - 이상원

 

 

세상에서 퇴출된 내가 아직 거기 근무 중인 당신과 통화를 한다.

 

멈추거나 뒷걸음질하는 건 죽음이에요. 분리대를 넘기 전엔 속도를 맞춰가며 앞으로만 가야 해요.

 

나는 시간의 굴곡을 걸어서 온 사람, 바퀴들의 언어를 알 수도 없었고 지나가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길을 이미 아는 까닭에 북극으로 떠날 채비를 서둘러야 했다.

 

돌아보지 마세요. 환영(幻影)에 집착하는 눈알들은 도태되고 말거에요.

 

애당초 눈먼 내게 뒤돌아볼 거울일 있을 리가 없지만, 회춘을 꿈꾸는 누구도 복원의 시점을 대답할 수 없으므로, 하느님의 시계가 거꾸로 돌지 않는다는 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앞서간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바퀴들의 영역을 벗어나 전파가 잘 닿지 않는 산기슭에 접어들자 무수한 발자국의 지문이 화석 된 산길이 저 혼자 황당하게 누워 있다.

동지 지나 땅 밑에는 청미루 뿌리들이 하나둘씩 새움으로 지등(紙燈) 건다는데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눈들만 모여 사는 산 골 어디 백골 같은 산막(山幕)으로 숨어야 하는데

 

상관없이, 언제나 한결같은 하느님의 시계는 바늘에 나를 얹고 알 수 없는 어디를 향해 무심히 앞으로만 가는 중이다.

 

 

*시집/ 변두리/ 황금알

 

 

 

 

 

 

변두리 - 이상원

-만남

 

 

한 사람을 만났다. 아득한 세월의 저편이

물음표를 던지듯 문듯 꽃 하나 내밀었다.

이미 어두워져 알 수가 없는 내가

오래된 그 빛깔에 흔들리고 있었다. 슬픔이 일었다.

 

마를 대로 마른 기억의 골짜기 어디에서 느닷없이

꽃은 생겨난 것일까. 해맑은 목소리를 흔들어

변두리 빈터에 널린 적막을 들춰내는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와 다시 갈 수 없는 고향마냥

한 줌씩의 상처를 안고 술병들이 사라진다.

 

잡(雜)꿈에 시달려 초췌해진 밤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낡은 집을 더듬어 돌아가는 골목길. 술에 젖은 어둠이

어째서 만남은 슬픔인지 묻는 나에게, 허공에다 점점

눈발마냥 별빛을 흩날리며 다둑이고 있었다.

 

밤은 이제 막 시작하는 중인데, 한 사람이 가고

바람이 없는데도 기억 먼 저편으로 날려가는 꽃잎들

오늘 밤 내 꿈은 골목길에 묻혀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 이상원 시인은 1953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199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와 <문학과의식>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상의 한 점 풀잎>, <낙토를 꿈꾸며>, <지겨운 집>, <내 그림자 밟지 마라> 등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두 - 김유미  (0) 2021.07.06
당신의 바깥 - 권상진  (0) 2021.07.06
아주 오래된 기억 - 함명춘  (0) 2021.07.05
울음의 두께 - 이서린  (0) 2021.07.04
두 자리 - 천양희  (0) 2021.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