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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곳 - 임성용

저곳 - 임성용 누구든 저곳에 올라갈 때 내려갈 생각을 하고 올라간 것은 아니라네 한 발 한 발 허공을 오르는 힘은 오로지 마지막 남은 떨림뿐이라네 저곳 붙잡을 수 없는 바람이 태어난 곳 밤과 낮 해와 달이 말라가는 곳 저곳 벌거숭이 하늘에서 내려가도 편안히 발 딛을 땅 찾지 않으려네 저 높은 곳 한 사람이 사는 곳 저 높은 곳 한 사람이 죽은 곳 또 누가 평생을 다해 또 누가 목숨을 다해 *시집/ 흐린 저녁의 말들/ 반걸음 흐린 저녁의 말들 - 임성용 따뜻한 눈빛만 기억해야 하는데 경멸스런 눈빛만 오래도록 남았네 얼크러진 세월이 지나가고 근거 없는 절망 우울한 거짓말이 쌓이고 나는 그 말을 믿네 가난하고 고독한 건 그리 슬픈 일이 아니라네 진짜 슬픈 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용기도 헌신도 잃어버..

한줄 詩 2021.07.28

무덤은 철학가 - 이자규

무덤은 철학가 - 이자규 비명에 간 비명이 비를 세웠다면 그런 증후군은 나를 헤치울 것이다 천만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저 무덤은 제 몸이 낮아졌을 것이다 슬리퍼나 비닐들이 버린 나는 헌옷 수거함 속의 나다 비는 내리고 도심 한복판의 무덤가 비석인 내가 불안하게 비스듬히 서 있다 저것은 새벽 태공들 구름과자 연신 헤아리는 동리 개구장이 놀이터, 화강암 상석에 깔린 지린내와 꽁초의 기억으로 공중을 세웠을 터 세도가의 비문은 흐린 날씨 덕에 한껏 눈물 흘린다 오늘은 설날, 성묘 가는 모습들 아침부터 지켜보던 무덤은 마침내 소리 지른다 '차라리 이름이나 지우고 갈 일이지' 이민 간 그 자손들 저 소리 들릴까, 처연하고도 싸늘한 표정의 무덤은 꽃과 바람과 강물을 기억하고 있다 어두워지자 깊어갈수록 별들만 읽어내는..

한줄 詩 2021.07.27

내가 모르는 너의 슬픔은 - 이용호

내가 모르는 너의 슬픔은 - 이용호 관자놀이를 통과해 간 눈물들 모두 너의 영혼을 감싸고 있는 그늘 아마 영점 일 밀리그램도 안 되는 탄소와 나트륨과 질소쯤 될 거야 내가 모르는 성분의 네 눈물이 떨어져 내릴 때 내가 모르는 네 한숨이 내 어깨 위에서 울고 있을 때 이 세상은 여전히 내가 모르는 것 투성이 햇살이 내 안에 식민지로 내려앉을 땐 더 이상 슬플 게 없을 짐승들마저 최후의 고백 속으로 숨어 버리는 날이 오겠지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것들도 무심하게 바다로만 침몰해 갔으니 슬픔이 비껴갈 땐 한 발 물러서서 모서리로 물들어 가는 노을을 바라볼 것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저절로 침묵하는 건 없을 테니까 스스로 자취를 지운 저 지평선에서 누군가 스치듯 지나쳐 갈 때 꼭 눈물의 성분으로 닳아가는 ..

한줄 詩 2021.07.26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 윤의섭 시집

윤의섭 시인이 소문도 없이 시집을 냈다. 서점에 갈 때마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는 것처럼 시집 코너를 들른다. 요즘은 보통 토요일이나 일요일 오전이 그런 날인데 사람이 많지 않아 여유을 부리며 출판 동향을 탐색할 수 있어서 좋다. 언제나 나의 관심은 메이저 출판사보다 무명 출판사 시집이 먼저다. 그런 시집일수록 눈에 띄는 곳이 아닌 모퉁이 아니면 맨 아래 칸이다. 여행에서도 걸어야만 보이는 풍경이 있듯이 시집 코너에서도 쭈그리고 앉아야 보이는 시집이 있다. 어라, 이 시인이 시집을 냈네? 이 시인도 비교적 시집 내는 주기가 4년 정도로 규칙적이었는데 이번 시집은 조금 주기가 당겨졌다. 단순한 디자인의 소박한 표지가 마음에 든다. 사람도 반가우면 손부터 잡듯이 나는 반가운 시집을 만나면 표지를 쓰다듬는..

네줄 冊 2021.07.26

사랑이란 - 김익진

사랑이란 - 김익진 사랑은 탐험될 수 없는 은하 별들 속에 반짝이는 별 빈 공간에 가득한 어둠처럼 보이지 않으나 실재한다 우주의 무한한 팽창처럼 영혼은 원자의 불확실성 사랑은 어쩌면 일시적인 융합 후 긴 분해의 표류다 사랑의 본질은 알 수 없는 심연 영혼을 찾아가는 길 위에는 언제나 눈비가 내리고 녹는데 내 것이 아닌 것을 잃어버린 후 힘들어하면 사랑이라 한다 자유로웠던 마음이 과거에 잡혀 있고 안개 속 헤드라이트를 보고 고양이처럼 두리번거리면 사랑이라 한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새벽을 바라보면 누군가 사랑이라 의심하고 살아있음으로 충분한데 무중력의 영혼을 잡으려 하면 그것은 분명 사랑이다 사랑은 반드시 담론의 대상이 있고 구체적이다 그리하여 사랑이란 정교하지만 보이지 않는 소비의 밤 방문을 걸어 잠그고 ..

한줄 詩 2021.07.22

얼굴을 쉬다 - 김나영

얼굴을 쉬다 - 김나영 한 사흘 집 안에 틀어박혀 있으니 얼굴에서 해방된다 내 얼굴이 내 얼굴이 된다 타인의 시선이 각질처럼 떨어져 나간다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얼굴은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보이고 싶은 나와 보이지 나는 한 번도 일치하지 않는다 얼굴은 붉고 물컹한 낭떠러지 근엄한 표정 무서운 표정 다정한 표정을 장소에 따라 화장과 분장으로 덧칠하며 무기처럼 사용한다 이틀 만에 세수를 했다 해골과 가죽과 살만 오롯이 잡히는 내 얼굴을 오랫동안 씻고 또 씻었다 혹시라도 남아 있는 타인의 시선을 내 얼굴로 함부로 횡단하던 타인의 흔적을 씻고 또 씻어 냈다 나는 곧 외출을 할 것이다 독자의 손으로 넘어간 내 작품처럼 내 얼굴은 곧 금이 가고 해체되고 해석되어 왜곡될 것이다 나는 또 얼굴을 팔러..

한줄 詩 2021.07.22

오늘 저녁이 어느 시대인지 모르고 - 서윤후

오늘 저녁이 어느 시대인지 모르고 - 서윤후 폐허에 다녀온 뒤로 나는 범벅이다 아름다웠던 세상에 대해 회고할 준비를 끝마친 싸움들의 혼종 어떤 기억은 장난감 기차를 타고 간다 선로에 누워 잠들었던 이는 잠깐만 이렇게 있을게 하고는 영영 일어나지 않는다 폐허를 떠나온 뒤로 그 주소는 자꾸 선명해져만 간다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이 장난감 기차를 타고 떠난다 손을 흔들자 잠에서 깨어난다 나는 범벅이 되어 하나씩 지워간다 그러면 살 것 같았다 얼룩을 주인에게 돌려주려다가 간직하게 된다 사랑으로 생긴 무늬는 언제나 형편없이 굴고 끝나지 않기 위해 반복되는 풀벌레의 노래 개울의 첨벙거림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해 나는 범벅 가를 수 없는 슬픔의 혼혈 서로를 끌어안다가 가녀린 얼굴을 어깨에 포개고는 헤어지지 말자..

한줄 詩 2021.07.21

흙수저 - 이산하

흙수저 - 이산하 자본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한 사람이 쪽박이고 신자유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열 사람이 쪽박이다. 어느날 한강에 투신한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남자가 자기를 극적으로 건져낸 구조대원에게 억울한 듯 항의했다. "사고 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해? 당신이 앞으로 내 인생 책임질 거야?" "....." "흙수저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 되는 세상이란 걸 알면서 왜 무책임하게 구하냔 말이야!" "....." "대신 살아주지도 못하고 대신 아파해주지도 못할 거면서...." 젊은 구조대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못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묵묵히 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목숨을 구했지만 이날 문득 처음으로 자신이 그들의 고통을 연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심했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

한줄 詩 2021.07.21

명왕성의 항변 - 주창윤

명왕성의 항변 - 주창윤 태양도 깨어나서 보지 않으면 죽은 별이다. 나는 늘 깨어 저 바깥 끝에서 밀짚모자 같은 토성이나 삶은 달걀 같은 행성들의 소멸을 바라보며 슬퍼하였나니 내 품계가 몇 단계 떨어져서 들어보지도 못한 왜소행성이 되어 그냥 떠돌이 별이 되었지만, 너희들의 바깥에서 더이상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그 끝에서 기체의 사유로 살아왔다는 것을 아느냐! 저 바깥 끝에서 살아온 삶의 경계를 너희가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깨어 있지 않으면 태양도 그냥 죽은 별이다. *시집/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한국문연 사우나 출애굽기 - 주창윤 재앙의 나날들이었다. 열정의 청년 노예들은 애굽으로 팔려갔다. 한강 하구는 녹차라테가 되었고 양서류들은 시내의 우물마다 알을 낳았다. 열대 박쥐 떼가 들끓었고 독..

한줄 詩 2021.07.18

만리동 책방 만유인력 - 전장석

만리동 책방 만유인력 - 전장석 고갯마루를 마수걸이한 마을버스가 몇 사람과 접점하고는 내리막길로 이항한다 간판이 분필로 쓰인 책방은 방금 새로운 이론을 설명하려던 중이다 ​저녁 산책의 중력파가 만리동까지 미치면 거기, 작동이 멈춘 낡은 탁자 위의 시간들 수공(手工)이 되어 나를 내부 수리한다 무중력의 이 도시를 용감하게 횡행하던 한 권의 시집, 단 한 줄의 문장 속엔 궤도를 이탈한 소우주가 지구본처럼 떠돌고 평생 떨어진 사과를 줍다 허리 휜 내 이력이 통증이 가시지 않은 호롱불로 밤새 매달려 있다 막대그래프 같은 아파트와 낮은 곡선의 지붕들 그 아찔한 간극에서 자주 멀미하던 바람이 서점 어딘가에 불편한 기록으로 꽂혀 있다는데 언제쯤 그것들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불구의 시간들이 버릇처럼 그리움으로 발..

한줄 詩 2021.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