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두 자리 - 천양희

마루안 2021. 7. 4. 21:12

 

 

두 자리 - 천양희


스스로 속지 않겠다는 마음이 산을 보는 마음이라면
스스로 비우겠다는 마음이 물을 보는 마음일 거라 생각하는데
들을 보는 마음이 산도 물도 아닌 것이 참으로 좋다

살아 있는 서명 같고
말의 축포 같은
참 그것은
너무 많은 마음이니

붉은 꽃처럼 뜨거운 시절을
붉게 피어 견딘다
서로가 견딘 자리는 크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일상의 기적 - 천양희


갈 길은 먼데
무릎에다 인공관절을 넣고
지팡이는 외로 짚고 터벅터벅
서울 사막을 걸어갈 때
울지 않아도 눈이 젖어 있는 낙타처럼
내 발끝도 젖는다

갈 데까지 걸어봐야지
걸을 수 있는 만큼은 가봐야지
요즈음의 내 기적은
이 길에서 저 사잇길로 나아가는 것

딱 한걸음만 옮기고 싶은
고비에서 주저앉고 말았을 때
꿇었던 뒤에도 서서 걸었던 자국

걸음걸이가 불편해도 불행하지는 않아
먼 땅을 밟고 나는 걸어가는 사람

하늘을 나는 것도 물 위를 걷는 것도
아닌데 두 발로 땅 위를 걷는 것이
나에게는 기적인데

길은 얼마나 많은 자국을
감추고 있어서 미로인가
발은 또 얼마나 많은 길을
숨기고 있어서 발길인가

길 따라 가다보면
서울 사막에도 오아시스는 있어
나는 긴 길의 기억을 가지려고
가끔 쉬어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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