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기억 - 함명춘
바람 불면 바람 부는 쪽으로
풍애마을 한쪽 발을 지그 밟고 서있는
느티나무의 가지가 힘없이 기울어지곤 하였다
태양의 억센 팔뚝 안에서
월척같이 뛰어오르는 여름
마을 사람들은 비가 내리기만을 손꼽아 고대했지만
늘 하늘은 굳게 입술을 다물고
기다림의 가지 끝에선
맑은 피 대신 누런 고름이 새어 나왔다
마른 장작개비처럼 갈라진 전답들이
쉬 오지 않는 잠 근처까지 떠밀려 왔다 떠밀려 갔다
몇 평의 그늘을 일구며
바짝 푸른 허리띠를 졸라매는 물오리나무 숲
자꾸만 잔뿌리들은 죽음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고
책보다 배고픔이 더 가득 들어찬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피라미같이 쏟아져 내려가는 하굣길을 따라 무작정
싱경한 열여덟 열아홉 살 자식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따금 어둠의 발자국 소리가 되어
환청처럼 들려오는 저녁이면
아낙들은 긴 침묵 속에서 나와
가장 빛나는 별을 향해
자식의 안위를 빌고는 줄여도 줄여지지 않는
서로의 아픔의 기장을 자르며
다시 긴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마을 지붕을 적시던 별도
앞마당까지 울타리를 치던 고요도
물레에서 풀려 나오는 흰 무명실처럼
새벽이 움트고 있었다
*시집/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천년의시작
노거수 아래 - 함명춘
천장과 바닥도 그늘로 지어진 두 평도 채 안 되는 집
도깨비바늘같이 콕콕 찌르던 땡볕도 쉬어 간다
갈라진 평상 틈 사이로 기어들어 온 애기똥풀들이 부처처럼 미소 짓고
길 잘못 든 배롱나무 가지 하나가 잠시 꽃을 피우다 말고
까딱까딱 한 귀퉁이에서 졸고 있다 밥때엔 화투를 쥐고 몰려든 사람들
스물하고도 일곱 판을 내리 지다 피박, 광박에 쓰리고 한 판으로
지긋지긋하게 꼬였던 어느 한 인생의 팔자가 활짝 펴기도 한다
어느새 하늘 깊숙한 곳부터 자두처럼 달이 익어가는 저녁이 오고
빠르기만 한 세상의 바퀴에 치여 튕겨 나온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낯선 한 사내의 천둥 벼락 같은 울음이
터졌다, 뚝 하고 그친다 이내 갈 곳을 정한 듯 어금니를 물고
단단하게 구두끈을 동여매더니 서둘러 길을 나선다 덜컹거리며
마을 어귀 지나는 바람의 완행버스에서 어깨가 건장한 적막 몇이 내린다
# 함명춘 시인은 1966년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 <무명시인>,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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