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문증(飛蚊症) - 천수호

마루안 2021. 7. 31. 22:37

 

 

비문증(飛蚊症) - 천수호

 


꿈과 현실
나는 헷갈렸지만

모기는 피도 없이 들락거렸다
코를 골고 있는 너를 내려다보면
꿈 밖으로 터져나오는 현실의 비애 따위는
꿈에 긁는 한 쪽 뺨이었다
웃는 너는 종종 꿈속에서만 만났고
한 방울의 피는 현실에서 빠져나갔다
잠 속에서 뺨을 치며 너는 모기를 쫓고 있지만
현실에선 도무지 터지지 않았다
꿈 밖에는 쫓는 눈이 많아서
꿈속에서 손을 쓰는 건 속수무책이다
가끔 네 손을 대신해서
너의 뺨을 한 번씩 긁어주지만
눈을 뜨지 않는 너보다
나는 더 깜깜해져서
물어뜯긴 이빨을 찾지 못했다
나를 더듬어 찾던 네 손이
경계를 허문 내 옆구리에 잠시 닿았다 간다
네가 거두어 간 것은
빈손이었지만
나는 자꾸 앓듯이 피를 닦았다

 

 

*시집/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문학동네

 

 

 

 

 

 

불면증(不眠症) - 천수호

 


열쇠 구멍을 오래 비틀었다
문은 열리지 않고 열쇠만 휘어졌다
네가 슬그머니 걸어들어오는 것을 모르는 채
잘못 닫아버린 안방 문
흔들어도 비틀어도 뭉툭한 열쇠였다
네가 다가와 가만히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온건히 열리는 세상을 본 적 없어서
더 세게 눈을 감았다
극약 처방이라는 말이 열쇠 소리를 쩔거덕거렸지만
너는 마침내 새파란 칼끝을 내보였다
겁먹은 내 얼굴 위로 네 그림자가 포개지면서
칼끝이 문틈을 찔렀다
내가 오래 흔들던 손잡이를 너는 가볍게 비틀었고
어둠을 와락 넓히며 너는
나의 큰 키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좁고도 넓고 어둡고도 환한 방이었다

 

 

 

 

# 예전에 선배에게 비문증 얘기를 들었을 때 그런 것도 있느냐며 깔깔 웃었다. 누군가 매일 밤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고 했을 때 속으로 중얼거렸다. "팔자가 편해서 그럴 거야" 머리에 베개만 닿으면 5분도 안 걸려 꿀잠에 빠져드는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노안이 오고 지금은 돋보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알람이 울 때까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이 많았는데 새벽이면 잠이 깨어 금방 다시 잠들지 못할 때가 있다. 이제는 비문증도 불면증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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