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자수 혹은 고백 - 피재현

마루안 2021. 7. 29. 19:23

 

 

자수 혹은 고백 - 피재현


할머니 돌아가신 날 할머니의
쌈지를 훔쳤다

할머니는 가끔 그 쌈지를 열어
나에게 용돈을 주셨다
고쟁이 속에 손을 넣어 쌈지를 꺼내면
퇴계선생 하얀 심의(深衣) 차림으로
오솔길 걸어 나왔지만
주머니 속에는 세종대왕 우글거릴 것 같았던
매혹적인 주머니

두근거리는 가슴 닫아걸고
뒤안 정짓문 아래 쪼그려 앉아
열어 본 주머니에는
부적 한 장, 호박단추 둘,
내 중학교 교복에 붙었던 명찰 하나
들어 있었다
세종대왕은 어디로 몽진(蒙塵) 가시고 없고
퇴계선생 낯익다는 듯 내 행실을 꾸짖었다

그날 나는 할머니와 사별이 슬펐던지
앙꼬 없는 찐빵을 가른 것 같은 서운함 때문인지
엉엉 서럽게 많이도 울었다

그런 나를 보고 문상 온 사람들은
참 대견한 손주라고 그랬다

제사 때마다 엎드려 30년을 빌었으니
이제 할머니도 나를 용서하셨을 듯
해서 하는 말이다

 

 

*시집, 우는 시간, 애지출판

 

 

 

 

 

 

입동 - 피재현


새가 되어 날아가지 못한 나무들이
계곡을 따라 모여 섰습니다
저어새의 긴 다리는 서어나무의 뿌리
동박새는 아직도 통 큰 도토리를 품고 있습니다
소나무는 평생의 천형을 벗고 갈색 부엉이가
되었습니다
물푸레나무는 실컷 물을 마시는
물총새가 되고 싶었습니다
새가 되지 못한 나무들이 계곡을 따라
모여 서서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푸른 잎맥이 숨을 거두기 전에
한번 더 날아보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산 골골 나무들이 힘쓰는 소리가
새소리를 삼키고 바람을 일으켜보지만
기어이 잎은 떨어지고 있습니다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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