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말이 나를 삼켰다 - 천양희

마루안 2021. 8. 2. 19:34

 

 

그 말이 나를 삼켰다 - 천양희


아름다움이 적을 이긴다고 하기에
미소 짓는 이 꽃이 내일이면 진다는 걸 믿지 않았다

할 수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모아야 한다기에
한낮의 볕이 그늘 한뼘 들여놓는 걸 잊지 않았다

불은 태울 수 없고 물은 물에 빠질 수 없다기에
사람이라도 좀 되어보자고 결심했다

끝없는 풍경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기에
세상에 드러나 부끄럽지 않은 것이
꽃밖에 더 있을까 생각했다

삶에는 이론이 없다기에
우리가 바로 세상이란 걸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변했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기에
붓 쥔 자는 외로워 굳센 법이란 걸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갈피를 잡는 동안
그 말이 나를 삼켰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푸른 노역(勞役) - 천양희

 

 

바람은 잘 날이 없어 어쩌면

목 놓은 소리로 헤메는 게 아닐까

 

나무는 흔들리는 것이 참을 수 없어 어쩌면

뿌리 깊이 버티는 게 아닐까

 

나는 어쩌면

에고의 몸무게를 빼지 않아 무거운 게 아닐까

 

나에게는 아직도 써야 할 바람이 있고

꽃 피워야 나무 이름을 아는 몽매(蒙昧)가 있다

 

이건 어쩌면

지독한 나의 푸른 노역이 아닐까

 

 

 

 

# 천양희 시인은 1942년 부산 출생으로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새벽에 생각하다>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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