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음이 깔리기 시작한 낯선 방 - 이기영
바다는 여전히 환하고
달마중이나 기다리는 정박한 배들은
늙은 어부의 발소리를 귀신같이 알고 있지만
바람 속에서 저 혼자 무너지고 있는 지붕
언젠가 구급차에 실려 간
늙은 어부마저 돌아오지 않으면
혼자 남겨진 폐가 마당에
손질하다 만 그물이
뱀 허물처럼 아무렇게나 뒹굴고
페인트칠 벗겨 나간 담장에 하릴없는 담쟁이만
때 이른 장마를 몰고 와
청춘의 푸른 피처럼 흘러갈 것이다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글루미 선데이 - 이기영
택배를 받아 커터칼로 상자를 열었을 때
상자 안은 곧 터질 듯 수상한 공기 방울들로 가득했다
위험을 감지한 복어처럼
상품을 둘둘 말아 빵빵해진
공기의 방들
핥아 줄 수도 다독일 수도 없는
짧은 혀를 가져서
혼자인 날이
위험수위까지 차오르고 있다
공기 방울 하나를 터트리며 울음이 번진다
저 많은 공기 방울은 언제 다 터지나
중심을 버리고 둘레가 다 젖으려면
얼마나 많은 택배 상자가 와야 하나
외로운 사람들은 오늘도 화면 앞으로 모여들고
딸깍, 딸깍,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눈이 충혈되고
# 이기영 시인은 전남 순천 출생으로 2013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인생>,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가 있다. 2018년 김달진창원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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