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환멸에게 보내는 쪽지 - 박순호

마루안 2021. 7. 28. 22:38

 

 

환멸에게 보내는 쪽지 - 박순호


헝겊인형 가슴을 훔친 솜뭉치에서
선반을 주저앉힌 녹슨 볼트에서
애타게 사람을 찾는 전단지에서

종이 결을 모르는 잉크
제멋대로 움직이는 마우스
표현할 줄 모르는 고장 난 턴테이블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삼킬 때

알아볼 수 없는 필체에서
곰팡이 핀 식빵에서
벽장에 갇힌 꽃병에서

세월을 갉아먹는 서까래
부러진 목발

너는 우울을 생산하는 공장에 나를 취직시킨다

 

 

*시집/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 문학의전당

 

 

 

 

 

 

구멍 - 박순호

-블루홀

 

 

깨울 수 없는 잠

빛이 도달하지 못하게 주먹 모양을 한 덩어리진 전설

벌어진 틈으로 속삭이는 공명음

들리는가

여기로 와서 나를 열어보겠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기심 많은 당신의 몫

 

나는 부지런히 눈치를 보며 퍼즐을 맞춘다

몸의 질문은 부자연스럽다

파도는 탐구하는 자들을 싣고 끝없이 해안에 출몰한다

 

살아서 닿을 수 없는 바닥

스스로 내려놓지 못하는 무게

정확하지 않은 발음이 웅웅거리며

마지막 딛었던 족적이 떠오른다

 

죽은 자의 무릎에는 억겁에 이르러서야 겨우 구더기가 슬고

귓속에 갇혀 있던 지느러미가 움직인다

 

위독한 삶이

파란만장한 굴곡이

산발적으로 다가와 기웃거린다

불필요한 웃음과 불확실한 사랑이

맞물려서 빠지지 않는다

 

모든 힘줄을 세워 파란 각을 만든다 해도

어깻죽지에 힘을 빼고 숨을 참아낸다 해도

완전한 바닥을 건져내지 못하는 심연

 

내가 갖고 있는 서늘한 질감들이

한 근씩 떼어져 구멍을 채운다

 

 

 

 

# 박순호 시인은 1973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2001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무전을 받다>, <헛된 슬픔>, <승부사>,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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