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문도에서 - 이형권

마루안 2021. 7. 29. 19:33

 

 

거문도에서 - 이형권

 

 

겨우내 바다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거친 파도가 밀려드는 수평선 너머

저 혼자 장판지 같은 하루를 접었다 펼쳤다

바다는 속절없는 날들이 얼마나 쓸쓸하였을까요

 

바람 부는 모퉁이 벼랑길을 돌아서면

한겨울 매서운 해풍 속에서 앓던 열병을

동백꽃은 알고 있지요

그래서 잎새마다 선연하게 피꽃을 피워낸 것이지요

 

거역할 수 없는 운명만이 오직 붉은 가슴으로 피어나

겨울 바다의 쓸쓸함을 연모했을 뿐

지난 세월을 말해 무엇하리오

남풍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명주실 같은 봄빛이 반짝이고

어느덧 사랑과 이별의 경계에 이르렀습니다

 

세상의 길들이 저녁노을처럼 아득해지고

보이지 않던 추억들이 뚜렷해지는 시간

홀로 그대의 열망을 사랑했던 날들만이 남았습니다

손 내밀어도 닿지 않을 변방의 극지에서

찬란한 애모 빛깔로 동백꽃이 피었습니다

 

그리움으로 피어났다

순결한 영혼처럼 지는 꽃

지금 우리의 몸속에서 피는 동백꽃은

개화의 시간인가요

낙화의 시간인가요

 

 

*시집/ 칠산바다/ 문학들

 

 

 

 

 

 

가거도에서 - 이형권


세상의 끝자락에
서 보고 싶은 날이었습니다
가없는 하늘가에
노을이 내리고
그 길을 따라서 외딴섬 언덕 위에
길 잃은 나그네가 서 있습니다
초병들이 지키는 초소 아래에는
저녁 바다의 슬픈 노래가 있고
깊어가는 바다처럼
사랑했던 날들은 적막하기만 합니다
그리운 이여
언제 다시 우리가
저물어가는 바닷가를 서성일 수 있을까요
그대와 나 사이에
붉은 노을이 내리고 있습니다

 

 

 

 

# 이형권 시인은 1962년 전남 해남 출생으로 전남대 국문과와 동국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0년 진보 문예지 <녹두꽃>과 <사상문예운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칠산바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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