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을 왜 긋느냐고 묻는 아이야 - 안태현
내 가방엔 매일
빵과 달팽이와 알약과 술병이 넘친다
잘 닦인 거울처럼
비춰보고 싶은 것들이 넘칠 때가 있다
사랑니든 실핏줄이든
무엇보다
네가 왜 있느냐고 물었던 내 이마의 주름에
안개꽃이 지나갈 때
생각의 숲에 들어가
처음 보는 새의 가장 맑고 고운 목소리를
보란 듯이 찜해둔다
이만큼 왔으니
내 삶의 태반은
눈 둘 곳 없는 기다림이었으므로
어디 밑줄 하나 남아 있을까
자작나무 하얀 목덜미 같은
고백 한 구절
누구든 집어가라고 꺼내놓을 수 있을까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 안태현
어딘지 모를 지금에 이르러 사랑을 잃어버리고
뒤돌아보는 법도 잊어버리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밤이다 가끔 어둡게 걸었던 길이나 떠올리면서 생각을 다 쓴다
잠이 들지 않으면
달빛이 희미하게 부서져 내리는 걸 보고
내 여린 박동이
검은 풀잎에 내려앉는 것을 본다
읽을 수 있으되
지금이란 시간은
당신이 보낸 편지가 아니다
하마터면 후회할 뻔했으나 명백하게 혼자다 그리고 마침내 음각으로 새겨지겠지만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사람이게 하려고
웃고
잊어서는 안 되는 몇 가지를
울고
성의껏 먹는다
태어나는 동시에 날아가 버린 아름다운 목소리를 찾아서
검은 풀잎 위를 걷는다
*시인의 말
밤의 관사에
가끔 홀로 있었다
죽은 귀뚜라미를 들어내듯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무르고 또 무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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